‘은사주의 운동’과 ‘신사도개혁운동’의 신학적 특징들
<김병훈 교수_합신 조직신학>
‘은사주의 운동’은 하나님의 음성 듣고 행하는 것처럼 보여최종 계시인 성경의 권위를 뛰어넘는 위험성 가지고 있어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악한 영에 대해 승리했으며, 완전한 구속을 보증하는 성령을 받았음을 분명 인식해야 해
1. 몇 가지 실례들
‘제3의물결-은사주의 운동’의 신학적 특징들은 신사도개혁운동의 주창자인 국제추수선교회(HIM)의 설립자이며 공동대표이며 하비스트락 교회 담임목사인 한인 1.5세 체 안(Che Ahn) 목사가 최근에 한국에서 모였던 집회(2006. 5. 8-10, Cindy Jacobs 초청 잠실 올림픽홀)에서 한 간증의 한 토막을 살펴보면 잘 나타난다.
- 부흥은 많은 현상을 동반한다. 많은 떨림이 있다. ... 하나님은 나에게 성령과의 만남이 있을 때 환경에 대해서도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나는 강력한 몸의 진동과 떨림이 있었다. 실성한 사람처럼 뛰었다. 설명할 수 없지만 내 몸을 볼 수 있었다. 내 영이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영광이 둘러서 있는 보좌를 봤다. 주님과 하나 되는 순간 ‘너는 천국에서 나와 함께 앉아 있다’고 하셨다. 보좌는 권세를 뜻한다. 즉시 내 몸으로 돌아왔다. 이 육체이탈을 경험한 이후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 (전정희, “밀려드는 ‘新사도적 개혁 운동’ 파도,” 교회와 신앙, amennews.com, 2006.6.5)
체 안 목사는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에 기초하여 그는 육체이탈의 경험을 말하며, 그것이 곧 성령의 부흥이라고 말한다. 이는 성경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기 어려운 신비주의적 체험을 통한 현세의 문제 해결을 말하는 주장이다.
고린도후서 12장에 기록된 체험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그것이 곧 영혼과 몸이 분리되는 육체이탈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주님께로부터 받은 환상과 계시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한 은혜의 체험으로 인하여 바울 사도는 이로 인하여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당하는 일을 오히려 기뻐하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체 안은 자신의 신비적 체험을 말하면서 집회에 모인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를 하며 자신의 기도를 따라하도록 하였다.
- 제게 주신 권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시간 종교의 영을 묶나니, 궁핍의 영을 묶나니, 끊어버리노라.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갈 지어다. 다시 심나니, 믿음으로 내가 축복을 받습니다. 더 나은 직장을 받습니다. 월급의 인상을 받습니다. 승진을 하게 됩니다. 은총을 받아들입니다. 유업을 받습니다. 모든 빚이 끊어졌습니다. 수표가 내게 날아옵니다. 형통함이 옵니다.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의 그 일을 이룰 수 있도록. 할렐루야! (전정희, “밀려드는 ‘新사도적 개혁 운동’ 파도,” 교회와 신앙, amennews.com, 2006.6.5)
이 기도가 바울 사도의 기도와 얼마나 다른가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신사도적 직접계시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복음의 이해와 삶이 사도와 얼마나 커다란 차이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 비록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지 몰라도 - 인터넷에서 그들과 관련한 자료를 살펴보면 상당한 정도로 알 수 있다. 이 시대의 여성 예언자(?)로 높은 명성(?)을 누리고 있는 씬디 제이콥스(Cindy Jacobs)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 하늘로부터 두루마기가 와 있다. 하나님의 임재가 이 자리에 와 있다. 여기에! 저기에! 저! 저 뒤로 가고 있다! 바로 이 자리에! 여기! 저기! 취하라! take it! 뒤로! 뒤로! here! here! 여기 임재! 받으라! 취하라! 하나님의 파도가 임했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지금 일하고 있다. (전정희, “밀려드는 ‘新사도적 개혁 운동’ 파도,” 교회와 신앙, amennews.com, 2006.6.5)
씬디 제이콥스는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눈으로 보며 그것을 회중들로 하여금 손을 들어 잡는 손짓과 더불어 취하여 받으라고 외쳤다. 이러한 메시지와 현상에 담겨 있는 심각한 신학적 문제점과 오류들은 집회 현장 안에서는 오히려 성령의 물결이며 능력의 체험으로 간주되는 분위기에 덮여지고 오히려 고무된다.
2. 예언, 지혜, 지식의 은사
이러한 현상들을 결과하는 ‘제3의물결-은사주의 운동’은 다음과 같은 신학적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예언과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청취하여, 예언과 지혜와 지식의 말씀을 전하는 신령한 은사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 은사는 알파코스에서도 중심적인 은사로 높임을 받는데, 그 예언의 은사는 어떤 상황에서 어떠한 선택을 하여야 되는가와 관련한 내용, 그러니까 왼쪽으로 가야할 것인가 아니면 오른쪽으로 가야할 것인가와 같이 매우 구체적인 결정을 지시한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내용이다. 우리가 다 믿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역사와 삶 가운데 자신의 작정을 이루어 가신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할 옳은 도리가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교훈을 보이셨고, 이 교훈에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판단하여 순종토록 하셨다. 하지만 성경은 어디에서도 내가 무엇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을 하여야 할 것인지를 알기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행동을 하도록 교훈하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개인의 세세한 삶의 정황 안에서 신탁을 통하여 구체적인 인도를 받도록 교훈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성경은 누군가가 이러한 구체적이며 세세한 삶의 선택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말하여 주겠다고 주장하는 점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악한 영에 사로잡힌 자이므로 너희 가운데서 그를 제하라고 경계의 말씀을 주고 있다(신 18:9-14).
지식의 말씀은 알파코스와 빈야드에서 빈번하게 볼 수 있는 은사 가운데 하나이다. 이들은 치유의 은사를 행하기 전에 모인 이들 가운데 누가 치유를 받아야 할 것인지를 분별하여 낸다. 예를 들어, 이 자리 모인 자들 가운데 주님께서 치유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는데, 그 사람은 이러저러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사람을 찾아낸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아픈 부분과 동일한 신체 부위에서 자신도 아픔을 느낀다고 말하며, 그러한 사람을 찾아내는 은사이다. 말하자면 지식의 은사는 치유의 은사와 함께 가면 치유를 실행하는 은사이기도 하다.
이러한 예언과 지식의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말씀을 직접 받게 됨으로 그의 권위는 성경의 권위에 방불하게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성경보다 더 우월한 권위를 갖는다. 삶의 자리에서 성경의 교훈을 받아 성령의 조명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 이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비밀한 예언을 인정하게 되면 그러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자에게 영적 형편을 의지하게 된다.
말하자면 그 예언자(?)에 의하여 영적 질서가 재편성이 되며, 은사가 보이는 능력의 규모에 따라서 권위가 계층적으로 형성이 되며, 그 예언자는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열쇠를 지닌 자로 인정을 받게 된다. 즉 그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하나의 제사장, ‘다리를 놓는 자’(pontifex)로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열쇠를 가진 자가 되는 것이다.
사도 시대에 있었던 예언의 은사는 살아 있던 사도들에 의하여 무리한 무질서가 나타나지 않도록 통제를 받았다. 즉 성경의 권위에 의하여 통제를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사도들에 의한 성경이 기록이 된 이후에, 성경 이외에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는 어떠한 예언이나 계시가 있다는 것은 성경과 더불어 최종적인 계시적 권위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결코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3. 능력 기도
다른 하나는 이른바 ‘능력기도’의 추구이다. 능력기도의 능력이란 기도를 함으로써 기도의 응답을 확실히 보장을 받는다는 의미를 넘어서, 어떠한 현실의 미래도 우리의 의지대로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능력을 뜻한다.
능력기도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신자 일반과 일상의 일과 관련하여 대화를 나눈다고 말할 수 있는 어떠한 실례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현실과 미래를 바꾸는 능력기도에 담겨 있는 ‘능력’의 신학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와 충돌이 된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로 하여금 겸손케 하시고 또 고난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향한 선한 계획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자라 할지라도 연약한 성품을 갖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죄를 범하며 살면서 하나님의 교훈에 따라서 회개와 거룩한 순종의 인도함을 받는다. 복음은 고난의 십자가를 포함한다. 십자가의 신학이면서 또한 고난의 신학이기도 한 복음은 빈야드에서 말하는 능력의 신학과는 다른 것이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음으로써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생케 하시어 심어주신 새 성품에 따라 성경의 교훈에 순종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은혜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현실을 바꾸는 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요컨대 ‘능력의 신학’은 ‘고난의 섭리’를 부정하는 그릇된 결과를 낳는다.
4. 치유 사역
알파코스와 빈야드 교회의 신학적 특성들 가운데 ‘치유사역’은 그들 사역에 있어서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 치유사역은 외적인 신체의 치유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감정 및 영혼의 치유까지를 망라한다. 앞서 말한 예언적 지식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누구를 치유하시기를 원하시는지를 알아내 이후에 치유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위해 기도한다.
이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치유사역을 단순히 긍정적으로 보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강조해야할 교회사역의 핵심적 요소로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이들의 신학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기 때문이다.
빈야드 설립자 존 윔버가 그의 책 능력전도(Power Evangelism, 나단출판사, 2003년 7월)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들은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not yet)으로 표현이 되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의 이해에 따라서 자신들의 치유사역을 설명한다.
이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하였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에 의한 치유사역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아직은 아니기 때문에 모두가 치유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치유의 효과적인 범위의 측면에서 양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치유사역 자체는 ‘이미’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드러내는 표적일 뿐 하나님 나라 자체는 아니다. 즉 치유, 축사, 죽은 자를 살리심, 오병이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심, 물 위로 걸으심 등의 모든 이적들은 이것을 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이시라는 것과 그가 이루실 십자가와 부활의 사역을 가리키는 표적들인 것이다. 이러한 표적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십자가와 부활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평강의 나라, 임마누엘의 나라가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임할 것임을 보이신 것이다.
결국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죄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스러운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그의 부활로 인하여 성취될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아닌’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역이 재림으로 완성될 때에 이루어질 것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을 위한 십자가 죽음을 이루시고 또한 부활을 하셨으니, 이처럼 역사적으로 이미 일어난 구속 사건들을 믿거나 그 의미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표적들이 다시 새롭게 나타나기를 바랄 이유나 그것들에 의지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미 성경에 기록된 과거에 있었던 표적들을 믿고 그것들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만으로, 그것들이 표적으로써 가리키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되심과 그의 구속사역의 의미를 바르게 충분히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으로 인하여 죄사함과 하나님의 자녀됨을 누리는 임마누엘의 은혜가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음을 뜻하는 것이지, 누구나 이 세상을 살면서 치유의 사역을 행하며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마태복음 8장 16-17절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서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는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신” 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는 이사야 53장의 해석과 관련을 갖는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사야 53장은 ‘고난의 종’에 대한 예언으로서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말하여 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8장에서 치유와 관련한 이적에 대한 해설을 이사야 53장으로 연결한 것은 그 치유의 이적이 그 자체로 실체가 아니라 죄사함의 은혜를 가리키는 표적임을 말해준다.
즉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구속 사역을 가리키는 표적인 것이며, 그 표적들은 실체인 구속 사역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더 이상 구속사역의 이해를 위하여 필요한 것들이 아닌 것이다.
만일 ‘이미’라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 치유사역이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음을 말하며, 또 ‘아직은 아님’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은 모든 이들이 다 치유를 받는 보편적 완전성을 뜻하는 것이라면, 왜 비단 치유사역만이 그렇게 이해되어야 하겠는가?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이적도, ‘오병이어’ 이적도,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이적도, ‘물 위로 걸으시는’ 이적 등도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은 아님’은 치유사역의 효과적인 범위에 따른 양적 개념으로 구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체적으로 동일한 하나님 나라의 질적 완성의 개념에 따라 구별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신학의 관점에서의 ‘능력전도’의 변명은 신학적 타당성을 잃는다.
5. 영적 전쟁
끝으로 빈야드 제3의 물결의 신학의 특성 가운데 덧붙이고자 하는 것은 소위 말하는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에 대한 이해이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매우 심각하다. 프랑크 피레티(Frank Peretti)가 쓴 소설, 어둠의 권세(This Present Darkness, 예찬사, 1986)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영적 실상이 그러한 것처럼 이해하는 커다란 잘못을 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영적 싸움의 대상은 뉴에이지를 좇는 사람들 또는 악한 영들이다. 악한 영과의 싸움은 피터 왜그너(Peter Wagner)가 그의 책 기도는 전투다(Warfare Prayer)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개인적, 주술적, 전략적 전투의 세 구조로 실행이 된다. 이러한 영적 전쟁의 전재는 각 지역과 나라와 대륙마다에 각각의 영역을 관장하는 귀신들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과 개인적이며 주술적이며 전략적인 차원에서 전투를 실행하여야 하며, 이것이 성도가 부르심을 받고 있는 영적 전쟁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물리적인 물체나 건물들도 귀신들에 의하여 오염이 되어 있기 때문에 물리적인 건물이나 물체들을 향하여서도 축사를 통해 영적 전쟁을 치열하게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귀신들과 맞서서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적어도 주술적이며 전략적인 영적 전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축사의 은사를 사람들에 의한 대리적 전투를 통해서 실행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영적 전쟁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전쟁과 사뭇 다른 것이다. 성경적 의미에서의 영적 전쟁은 귀신들과 직접 대항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의 말씀에 근거하여 믿음의 도리를 확신하고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가며 사랑과 연합을 이루는 거룩한 공동체를 실현하며 섬기는 것과 관련한 것이다.
에베소서 6장에서 확인이 되는 영적 전투와 관련한 모든 교훈들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권면이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미(already)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악한 영에 대하여 승리를 하였으며(엡 2:1-3), 장래에 있을 완전한 구속을 보증하는 성령을 받았다(엡 1:13-14). 이러한 맥락에서 ‘이미’ 승리한 것이요, 완전한 승리는 ‘아직은 아닌’ 것이기 때문에, 성도가 지역에 속한 악한 영들을 내어쫓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귀신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감행하여야 하는 전략적 의미에서의 영적 전투는 결코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영적 전쟁이 아니며, 신뢰성을 갖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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