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와 동아시아 ― 일본어역 신공동역 성서의 경우를 중심하여 ―

한국신학정보연구원에서 스크랩합니다. http://iktinos.org/

「구약성서」와 동아시아 ― 일본어역 신공동역 성서의 경우를 중심하여 ―
발표자: 츠키모토 아키오


1. 일본어역 성서의 역사
 
  
일본에서의 성서번역사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549년에 예수회에 의한 일본선교가 시작되면서, 1563년에는 이미 복음서의 일본어 번역이 완료되었지만, 그 원고들은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 그 후, 성서일과(聖書日課)와 복음서 번역이 이루어져, 영국의 동인도회사의 무역사령관이었던 세이리스(J. Saris)는, 쿄토(京都)에서 인쇄된 일본어 번역성서를 목도하였던 사실을 1613년 10월의 일기에 남기고 있다. 그러나, 그 실물은 오늘까지 확인되지는 않는다. 1614년부터 본격적인 기리시탄 금제(역자주: 기독교 포교 금지령)가 일본 전국에게 내려졌기 때문에, 이 때에 분실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기리시탄 시대의 이러한 일본어 번역성서 안에 구약성서가 포함되어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1) 그러나, 기리스탄교 금제를 정책화한 에도 시대에서도, 은밀하게 기독교 신앙을 계속 유지한 「숨어지낸 기리시탄」들은 「천지개시의 사건」으로 불리우는 문서를 전하고 있다. 성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그들은, 예수회 선교사로부터 들은 천지창조로부터 에덴 동산에서의 원죄 설화를 일본풍으로 해석하여 전한 것이다2). 
 18세기 말에는, 나가사키(長崎)의 히라도(平戶)의 지방 영주 마쯔라 세이잔(松浦靜山)이 매튜 헨리(Mathew Henry)의 방대한 구약성서 주석의 네델란드어판을 입수해 번역을 시도하였다. 또, 에도시대 말기의 국학자나 양학자들은, 1813년에 완성한 한역  성서「신유조서(新遺詔書)」, 1823년에 완성한 한역성서 「구유조서(舊遺詔書)」등을 통해 성서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19세기 중순, 메이지 유신 직전에는, 미국인 선교사 브릿지맨(E.C.Bridgeman) 등에 의한 개역 한역성서(1861년 완성의 「신약 전서」, 1963년 완성의 「구역전서」)가 일본에도 유입하고 있어, 이것이 메이지 시대에 일본어역 성서가 발행될 때까지, 넓게 읽혀지고 있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1973년에 그리스도교 금제가 풀리지만, 구약성서의 완역은 신약성서에 비해 늦어진 것 수십년, 1888년의 성서번역상치(常置)위원회역「구약 전서」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구약전서」는 한역「 구역전서」를 밑그림으로 한 것이며,「제 2정경(=구약성서외전=구약성서속편)」을 포함하지 않는 프로테스탄트 측의 구약성서이었다. 카톨릭이나 하리스트스 정교회측에서도 독자적인 성서 번역이 시도되었지만, 구약성서 완성에는 이르지 않았다. 제2차 대전까지 널리 이용된 구약성서는 이「구약 전서」이며, 오늘날 더욱 문어역성서로서 일부의 사람들의 사이에서 사랑받고 있다. 그 사이, 교파적 입장에 선 번역이나 사역도 시도되었으나, 그것들은 모두 부분 번역에 머물렀다. 초기 단계의 일본어 번역성서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God가 「하나님」, love가 「사랑」이라고 번역되기에 이르는 흥미로운 논의도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좀 더 논급할 여유는 없다(스즈키 노리히사 감수 「성서와 일본인」,대명당, 2000년). 
 구약성서의 개역이 차례 차례로 발간되는 것은 전후의 일이다. 우선, 1955년에 프로테스탄트측에서 구약성서를 포함한 구어역『성서』간행되었다. 1964년에는, 사레지오회 바르바로 신부에 의한 구약성서가 완성되어, 지금까지의 신약성서와 합하여 바르바로역『성서』가 출판되었다. 이 구약성서는 「제 2의 정경」을 포함한다. 구약성서의 불가타역도 1959년에 광명사로부터 출판되었다. 한편, 프로테스탄트 복음파들도 독자적인 번역을 진행시켜,1965년의 신약성서에 이어서,1970년에 구약성서의 번역을 완성시켰다. 이것은 신개역 『성서』로 불리운다. 1970년대에는, 세계 기독교계에서의 「초교파일치 운동(에큐메니즘)」의 영향을 받아,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공동 번역 사업이 진행되면서 1987년, 구약성서가 완성되었으며, 그 보다 10년전에 완성된 신약성서와 합하여 신공동역『성서』가 탄생되었다. 카톨릭교회의 「제 2정경」은 「구약성서 속편」으로 번역되어, 이를 포함한 판과 이를 제외한 판이 간행되고 있다. 이 사이, 구약성서 학자에 의한 개인역도 출판되었다. 그 중에서도, 세키네 마사오(關根正雄)역은 창세기로부터 이어진 9권의 분책이, 이와나미 문고 씨리즈에 포함되어, 널리 독자들을 모았다. 세키네 마사오역은, 1995년, 「제 2정경」을 제외하는 구약성서 완역하였다(敎文館). 1996년 이후, 구약성서 번역 위원회편의 개인 분담역『구약성서』(이와나미 서점)는 전 15분책 중 13권이 출판되었다. 덧붙여서, 아라이 사사쿠―사토 미가쿠 두 사람의 책임 편집에 의한 이와나미 성서판 「신약성서」는, 1996년에 다섯 분책으로 완결하여,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  일본어역 구약성서에서 보는 「일본적」번역 
  
기독교 각 교파의 교리상의 요청을 별도로 두고 생각한다면, 전후 일본에서의 성서번역의 역사에는 두 가지의 큰 동기가 작용해 온 것으로 생각한다3). 
그 하나는 원문에 의해 보다 충실한 일본어 번역 성서의 발간의 동기와, 또 다른 하나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알기 쉬운 일본어 성서를 제공하는 동기이다4). 그러나, 원문에 충실한 구약성서 번역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구약성서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문법적으로 부자연스러운 구절이 너무나 많다. 기본적인 의미를 확정할 수 없는 단어도 적지 않다. 이러한 구절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해석하지 않는다면, 일본어로 옮길 수 없는 것이다. 알기 쉬운 일본어로 번역한다고 하는 경우에도, 해당 구절에 대한 일정의 해석이 행하여질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해석의 흐름 속에서 선의의 오해가 일어나지 않는지에 관한 점이다. 특히, 일본어로 알기 쉬운 번역을 목표로 하려고 하면 할수록, 무의식 가운데 일본적인 발상이나 감성이 은연중에 잠입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것이 원의를 왜곡해 버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오해는, 구약성서에서 보다 좋은 일본어역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순적인 현상인 것이다. 동일한 현상이 한국어역 성서의 경우에도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자에게는, 최근 한국어역 성서에 관한 평가를 내릴 정도의 능력은 없기 때문에, 이하에서는, 전체적으로는 가장 뛰어난 신공동역 『성서』의 구약성서 부분을 열거하면서, 일본적 오해라고 생각되는 몇몇의 구절을 여기에서 검토하고 싶다. 

  1) 「여자」인가 「아내」인가? 창세기 3장 16절의 경우. 
  
    우선, 「에덴 동산의 설화」의 한 절, 뱀에 유혹되어 선악과를 먹은 최초의 「여자」에게 내려진 신 야훼의 말씀(창세기 3장 16절)에서 시작하기로 하자.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개행, 인용자) 

 종래의 다양한 번역들과 비교할 때, 이 신공동역에는 주목해야만 할 구절이 두 곳이 있다. 「임신의 고통」과「네가 남자를 지배하려고」의 구절이다. 

전자의 역어는 구어역 「출산의 고통」이 아니라, 문어역의 「회임(はらみ)의 괴로움」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된다.「회임」의 히브리어 헤-론(heron)은 출산이 아니라, 여성이 아이를 태내에 잠재우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구어역의 「낳음의 괴로움」은, 일본어로 알기 쉽다하더라도, 정확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회임」이라는 일본어에는 미묘한 모멸적인 울림이 동반된다. 자신의 아내가 「배었다」라고 해서 기뻐하는 남편은 우선 없다. 그 때문에, 바르바르역이나 신개역에는 보다 품위 있는 「몸/미고모리」라는 역어를 적용하고 있다. 신공동역은 그것을 알면서도, 과감히 「회임」쪽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후자의 「너는 남자를 요구하고」도 선행하는 다양한 번역과는 상당히 다르다. 선행하는 다양한 번역들은 모두 「남자를」이 아닌,「남편을」이라고 번역하며, 동사는「요구하고」가 아니고, 「시타우/그리워한다」(문어역, 구어역, 바르바로역)내지는「연모한다」(신개역)로 번역하고 있다. 신공동역과 선행하는 다양한 번역들 사이의 이 역문의 다른 점은,「회임」의 경우와는 달리, 의미의 다른 점을 드러내고 있다.「남자를」은 「남자라면 그 누구라도」라고 하는 의미로 해석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자」에게 말하는 신 야훼의 말씀 전체의 의미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즉, 뱀에 유혹되어 선악과를 취해 먹은 여자는, 이후, 상대를 상관하지 않고 남자를 요구하게 된다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이쉬('ish)는, 생물학적 의미의 남자가 아니고, 사회적으로 성인이 된 남성을 나타낸다. 이 구절과 같이 여성단수 접미대명사 「당신의」가 붙는 경우는 「남편」을 가리킨다. 신공동역 역시, 여성단수 접미대명사가 붙는 구절에서는, 여기와 창3:6절 이외에는 모두「남편」이라고 번역하고 있다(창 16:3, 29:32.34,30:15,18,20). 따라서, 창세기 3장에 관해서도, 접미대명사가 붙는 이쉬는 기본적으로 「남편」으로, 잇샤('isshah)의 경우는「아내」라고 번역해야 되지는 않았는가? 설화 자체에서, 남녀의 결혼을 명시하는 2장 말미에 연결되어 있는 동사에 대해서는,「그리워한다」와「요구한다」의 어느 쪽이 보다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다. 원문은 히브리어 특유의 명사문인(「당신의 남편을 향해, 당신의 테슈-콰-는 있다」)이며, 테슈-콰-(teshuqah)라고 하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모르기 때문이다5). 
 창3:16절의 신공동역은 선행하는 다양한 번역들을 이와같이 변경한 이유를 필자는 모르겠다. 그러나, 신공동역에 근거하는 구약성서의 주석서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사실은 확인해도 좋을 것이다. 

《회임의 괴로움》은------(중략) 직역하면,「너의 괴로움과 너의 임신」으로 번역할 수 있다.「임신」은「성욕」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말이며, 이 경우,《너는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는다. (그럼에도 더욱), 너는 남자를 연모하게 된다》라는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의 의미와 일치한다6). 
이 주석은, 여성이「고통스럽게 아이를 낳으」면서도, 한층「남자를 연모하는」것은, 하나님에 의해 과도한「성욕」이 (벌로서) 여성에게 부과되었기 때문이라고 3장 16절의 의미를 해설하고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주석가는 여기서「임신」을「성욕」과 동일시하는 잘못된 인식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7), 그것이 여성 멸시와 관련되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임신」이 여성의 성욕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남성의 성폭력에 의해 원하지 않는 아이를 임신한 여성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원래 구약성서의 하나님이 여성의「성욕」만은「벌」로서「취하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하나님이었겠는가? 
「에덴 동산」의 설화가 성서에서, 더 나아가서는 기독교의 인간관의 요체를 이루는 구절로서 중시되어 읽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무책임한 주석이 「신공동역 구약성서주해」로서 발간되었던 것은 실로 유감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의 일단은 신공동역의 번역문에 기인하고 있다하더라도, 또한 번역자들의 사이에 의식적인 여성 멸시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여성멸시를 조장할 수 밖에 없는 주석을 허용하는 듯한 역어와 번역문을「에덴 동산」의 설화의 한 부분에 남겨버렸기 때문인 것이다.「회임」과「남자를 요구한다」라고 하는 역어와 번역문에는, 마치, 전후 반세기 이상을 거쳐서도 한층 더 남아있는 남존여비의 일본적 풍정이 숨어있는 듯이 보인다. 


   2) 자연이해를 둘러싼 창세기 8장 21절의 경우 

 구약성서의 자연관은 새롭게 정정되기를 요청받고 있다. 자연 파괴나 환경오염이 지구적 규모로 문제화된 1980년대 이후, 기독교적 자연관에 대한 다음과 같은 비판의 소리가 들리게 되었다. 즉, 구약성서의 인간 창조의 기사 (창 1:26 이하)에 근거하여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로 평가하는 기독교적 발상이, 인간생활의 편리함과 쾌적함을 위해서는 자연을 이용하여 고갈시켜도 상관없다라고 하는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를 낳아, 오늘날의 자연파괴나 환경오염을 가져오는 사상적 원흉이 되었다고 말이다라고. 구약성서의 자연관의 전모를 여기서 논할 수는 없지만, 구약성서의 자연이해라고 하는 점에서 놓칠 수 없는 번역문을 하나를 열거해 보고자 한다. 
창세기 8장 21절의 일부분인 홍수 설화가 마무리되는 문맥에서 야훼가 한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신공동역의 번역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사람에 대해서 대지를 저주하는 것은 두 번 다시없다. 

  이 번역문은, 일순간, 독자를 당황하게 한다.「사람에 대해서」라고 번역한 일본어 표현은 독자들에게 바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존의 일본어 번역성서에는 「사람으로 인해서」(文語譯), 「사람 때문에」(口語譯, 新改譯), 「인간 때문에」(바르바로譯)로 번역되었다. 이 모두가 공통적으로 대지의 저주 즉, 홍수로 인한 대지의 황폐는 인간의 악에서 기인한다는 해석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공동역에서는 이것을 과감히「사람에 대해서」라고 번역하였다. 「--- 에 대해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bāăbûr는 보통은 이유나 원인(때로는 목적)을 나타내는 전치사구이다. 신공동역에서도, 창세기 3장 17절을 포함한 이 전치사구는 「너 때문에」라고 번역되고 있다(창 12:13.16, 18:26, 26:24 등). 따라서 「사람에 대해서」라는 번역은 의도적인 것이며, 번역자는 그것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 대해서 대지를 저주한다」라는  표현 자체는 애매하기 때문에, 독자들에게는 그 번역자의 의도가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다. 전술한 주석서에서도, 「《사람에 대해서》는 「인간 때문에」 「인간 탓으로」라는 의미」라고 해설될 뿐이며8), 그렇다면 왜 「인간 때문에」라고 번역하지 않았는가 하는 설명은 없다. 
 추측하기에 이 번역은, 신공동역이 홍수 설화를 인간악에「대한」처벌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한 결과가 아닐까? 즉, 홍수는 악을 행한 인간에 「대해서」내려진 처벌수단이었다고 해석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사람에 대해서」는「사람 때문에」의 경우와는 미묘하게 다른 자연 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대지에 대한 저주를 하나님이 인간을 처벌하는 수단으로 수용하는 자연 이해는, 구약성서에서 자연재해나 천재지변을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는 야훼 하나님의 처벌수단으로 간주하는 예언자 아모스의 사상(암 4:7.9 등)과 연결되고, 율법을 거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저주」속에 자연의 모든 재해를 위치시키는 신명기의 자연 이해(신 28:5 이하)와 겹친다. 이러한 자연 이해가 구약성서 자연관의 한 단면을 이루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자연재해나 천재지변을 천벌로서 받아들이는 것 자체는 자연에 대한 고대적 감각이며, 반드시 구약성서에 특유의 자연관은 아니었다. 
 한편, 인간의 악 때문에 대지가 저주를 받는 것이라면, 인간의 악이 대지에 황폐를 초래한 것이며, 그 책임은 인간에게 귀속된다. 인간악과 자연의 황폐를 연관시키려는 이러한 발상은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같은 피조물인 자연을 포용하는 공존․공감의 감각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한 감각은 구약 예언자의 언어 속에 숨쉬고 있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서 12장 4절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언제까지 이 땅은 마르고 들판의 푸른 풀도 모두 시든 채로인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악이 새와 짐승을 멸절시켜 버렸다. (新共同譯, 행바꾸기와 쉼표는 인용자) 

  여기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인간악과 자연의 황폐와의 사이의 연관을 분명하게 통찰하며 그것을 자연을 향한 공감과 동정을 가지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 이해야말로 구약성서 특유의 사상인 것이다.9) 
 번역자는 원래 「사람 때문에」에서 「사람에 대해서」라는 번역어의 변경이 자연 이해의 변경과 연관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구약성서의 자연 이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8장 21절의 번역에는 3장 17절과의 호응 관계가 고려되었을 것이다. 또한, 신공동역은 6장 11절을 「이 땅은 하나님의 앞에서 타락하여」10)라고 번역함으로써 홍수 이전 인간뿐만 아니라 대지까지도 「타락해」있던 것 같은 인상을 독자에게 주며, 또한 8장 21절은 3장 17절과 공통되는 전치사구를 「사람에 대해서」와「너 때문에」와의, 동일 언어를 「대지」와「흙」으로 분리하여 번역하는 것으로 두 개의 절 사이에 존재하는 사상적 관련성(「인간악으로 인한 저주받은 자연」)을 희석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고찰이 틀리지 않는다고 한다면 신공동역은 기독교 외부에서 제기된 구약성서의 자연 이해에 관한 질의에는 개의치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 자연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품고, 자연에 의탁하여 사상을 설파하기까지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연을 자연으로서 올바로 대면하지 않은 채, 자연 파괴와 환경오염을 허용해 온 근대 일본의 궤적과 상통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3) 예레미야서에서의 「신분」이라는 번역어 

   아모스를 효시로 하는 구약성서의 이른바 기술예언자들이 외쳐 마지않았던 것들 중 하나가 사회정의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 옹호는, 「계약법전」(출 20:22-23:33)을 필두로 하는 율법에 규정되어 있듯이, 노예에서 해방을 역사의 원점으로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과된 하나님 야훼의 생각 그 자체로 전해졌다. 예언자들은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이 마땅히 행해야만 할 「공평과 정의」(암 5:7.24, 사 5:7 등)로 수용하면서, 그 실천을 백성들에게 요구했다. 또한,「공평과 정의」의 유린에 대한 하나님 야훼의 엄격한 심판을 고지했다. 
 왕국시대 말기에 등장한 예언자 예레미야 또한 이러한 예언자 전통에 서 있다(렘 7:5 이하, 21:12, 22:13 등). 그러나 예레미야에게는「공평과 정의」를 유린하는 불의와 부정은 바로「마음(lēb)」의 문제였다. 예를 들어, 그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당신들 마음의 악을 씻어 맑게 하라」(렘 4:14)라고 요구하며, 하나님 야훼의 율법을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마음」의 악(惡) 때문이라고 단죄한다(렘 7:24, 9:13, 11:8, 외). 하나님 야훼는 사람의 「마음」을 속속들이 감찰하시는 분이라는 점을 반복해서 기술한다(렘 11:20. 17:10, 20:12). 이처럼 내면을 응시하는 눈길이 예레미야 예언의 특색이라고 말하여도 좋을 것이다.11) 
 이와 같이 예레미야가 백성이 범하는 불의와 부정을 그들의 내면의 죄에서 기인되고 있다고 파악한다면, 그의 눈에는 권력과 재력을 가진 사람들의 거악이나, 약소한 사람이 범하는 소악이, 질적으로는 동일한 것으로 비쳐져 있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부정한 이익을 탐내고」(렘 6:13, 8:10. 구어역)라는 말에서, 이러한 예레미야의 관점이 표명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왠일인가 이「작은 자에서 큰 자까지」를 신개역성서는 「신분이 낮은 자에서 높은 자까지」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신공동역은 이 번역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원문을 직역한 「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라는 표현에는, 분명히 어떤 모호함이 존재한다.12) 「신분이 낮은 자에서 높은 자까지」라는 번역이 이해하기 쉽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번역은, 마치 예레미야가 「신분」의 기준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독자에게 남긴다고 한다면, 이는 인간 내면에 시선을 향했던 예레미야에 대한 오해를 초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신분의 높음과 낮음」이라는 가치관은 차치하더라도,「신분」이라는 발상 자체가, 노예에서의 해방을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인 원점으로 출발하는 구약성서 사상과는 상충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서 히브리어에는 일본어의「신분」에 해당하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13) 그렇다면, 문어역, 구어역, 바르바로역의 예레미야서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신분」이라는 번역어가 어떠한 경유로 신개역에 들어오게 된 것일까? 
 다소의 표현상의 차이를 감안한다면,「작은 자(qātōn)」와「큰 자(gedol)」라는 것이 대응어로서 사람에 사용되는 용례는 구약성서 중에 적어도 26구절이 있다. 신개역은, 그 중에서 예레미야서의 7 구절(6:13, 8:10, 16:6, 31:34, 42:1.8, 44:12)과 요나서 3장 5절, 에스겔서 1장 5, 20절의 세 구절에다 새롭게「신분」이라는 말을 보충하여 번역한다. 신공동역도 기본적으로 이것을 답습했다(잠 25:6에서도). 소급해서 본다면, 문어역은 「늙음, 어림/젊음(老,幼/若)」을 사용하는 두 구절(삼상 5:9, 30:2) 이외의 모든 곳에서 「크고 작음(大/小)」을 사용한 번역어를 쓰고 있다. 구어역은 5구절(창 19:11, 삼상 5:9, 대하 15:13, 31:15, 34:30)에서 「늙음과 젊음」을 적용하며, 그 이외는 「크고 작음(大/小)」을 기본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에스더 1장 20절만은「높고 낮음의 구별 없이」라고 번역했다. 바르바로역도 「크고 작음(大/小)」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때로는 「어른과 아이」를 적용하며, 예외적으로 예레미야서 42장 8절을「위대한 자도 비천한 자도」로, 에스겔 1장 20절을 「신분의 고하를 묻지 않고」로 번역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번역사를 보면, 에스더 1장 20절의 구어역 「높고 낮음의 구별 없이」를 수용한 바르바로역이 이를 「신분의 고하를 묻지 않고」라고 번역하면서,「신분」이라고 하는 말이 처음으로 일본어 역 구약성서에 등장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개역이 이것을 예레미야서와 요나서로 확대시키고, 신공동역이 이를 계승하였던 것이다. 
 신공동역은 예레미야서의 앞서 기술한 7개의 용법 가운데, 처음의 3 구절을 「신분이 낮은 자/신분이 높은 자」로, 마지막 3구절은「신분의 상하를 불문하고」로 식별해서 번역하였으나, 예레미야서 31장 34절만은「신분」을 사용하지 않고,「작은 자도 큰 자도」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처럼 식별해서 번역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예레미야서 31장 34절에서 「신분」이라는 단어를 배제한 것은 각 사람의 마음에 율법이 기록되는 「새로운 계약」의 시대에 「신분」이라는 용어가 상응하지 않는다는 배려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인가? 
신공동역은 그 대신 예레미야서 5장 4절에 「신분이 낮은 자들」을 등장시킨다. 이 원어 달림(dallîm)은 사회적 약자를 표현하는 용어이며, 신공동역 이사야서와 아모스서에서「약자」혹은「결핍된 자」(사 10:2, 11:4, 암 2:7, 등)의 의미로, 예레미야서 39장 10절에서는 「가난한(백성)」으로 번역된다. 이 사회적 약자가 예레미야서의 이 구절에서는 낮은 「신분」으로 해석되고 만 것이다. 그것은 다음 절인「큰 자」(gedolim, 전술한 gedol의 복수형)로, 신개역을 모방하여「신분이 높은 자들」이라고 번역한 결과, 그것에 맞추어야할 필요가 생겼던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시대, 왕가를 정점으로 하는「신분」계층이 왕국시대의 이스라엘 사회에 존재하였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가「신분」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사회를 보고 있었는지 어떠했는지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이다. 전술한 예레미야의 사상적 특색에서 본다면, 그 일본어역에 등장한 「신분의 고저」나 「신분의 상하」라는 발상은, 예언자의 발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수직 사회」일본의 사회관(中根千枝, 나카네 치에)을 무의식 중에 반영시킨 결과라고 생각한다. 역사서의 일본어역에는 「신분」이라는 보조적 용어는 없다. 다만, 원어의 「대소(大小)」가 「상하(上下)」라고 번역되는 예가 신개역과 신공동역에 산견된다(예를 들면 왕하 23:2, 25:26). 
  
4) 코헬레트의 「하벨․하바-림」의 번역어를 둘러싸고 
  
    한역(漢譯) 「舊約全書」(1963년) 이래 「전도서」(신개역 성서에서는 「전도자의 책」)로 불리며, 신공동역이 새롭게「코헬레트의 말씀」이라고 불리우는 구약성서 중의 한 책은, 서두부(1:2)와 결미부(12:8)에 이 책의 주제를 나타내는 언어를 배치하여, 이 책 전체를 정리하고 있다. 우선, 문어역, 구어역, 바르바로역, 신개역, 신공동역의 순서로 그 언어의 역문을 열거해 본다(단,「전도자/코헬레트는 말했다,---- 라고」의 부분을 삭제하고 쉼표도 다소 변경했다). 

문어역        헛됨의 헛됨  헛됨의 헛됨이 되는 구나 모든 것은 헛되다. (1:2) 
               헛되고 헛되도다 모두 헛되도다        (12:8) 
구어역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바르바로역    허무한 것의 허무함, 허무한 것의 허무함, 모든 것이 허무하다. 
              허무한 것의 허무함, 모든 것이 허무하다! 
신개역        헛됨의 헛됨. 헛됨의 헛됨. 모든 것은 헛됨.   
              헛됨의 헛됨. 모든 것은 헛됨. 
신공동역      무어라 할 수 없는 허무함, 무어라 할 수 없는 허무함, 
              모든 것이 허무하다.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모든 것은 허무하다. 

 이러한 일본어 번역 모두에서 사용되는 「공(空)」이라는 한자는 한역성서에 유래한다. 그 히브리어는 헤벨(hěběl), 「空の空」그 밖에 번역된 부분 하베르 하 베-리-ㅁ(「헤벨 속의 헤벨」)은 히브리어적인 강조형인 것이다. 원래「氣息(호흡)」을 의미하는 헤벨은 구약성서 안에 73개의 용례가 있고, 그 중 38개의 용례가 「코헬레트의 말씀」에 집중되고 있다. 즉, 헤벨은 「코헬레트의 말씀」의 주제어 중의 하나인 것이다. 이 책 전체의 사상과 관련하는 헤벨의 번역어에 대해서는, 여러 입장에서 논의될 수 있으나, 여기서는 그 문제를  다루지 않고14), 일본어역의 특징에 주목하고 싶다. 

 위에서 열거한 5개의 번역문을 비교해 보면, 우선, 신공동역의 「무어라 할 수 없는 허무함」이라는 번역에서 참신함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문어역에서도 「허무하도다(空なる哉)」와「허무하여라(空なるかな)」의 문말 조사에, 바르바로역에서도 「空しさ(허무함)」이라는 체언종결형와 감탄부호 「!」에, 다소의 감정이 담겨져 있다. 한편, 구어역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와 신개역 「헛되고 헛됨. 모든 것이 헛됨」은 의식적으로 그러한 감정을 절제한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불교적인「一切皆空(모든 것의 헛됨)」에 가까운 표현이 되었다. 그것에 비해서, 신공동역은 이것을 영탄조로 번역함으로 번역문 전체에 「허무함」의 정감을 넘치게 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상기되는 것은, 가라기 쥰산(唐木潤三)이나 가메이 가츠이치로(龜井勝一郞)가 지적한 일본인의 무상관(無常觀)의 특징이다.15) 가라기 쥰산은 일본의 무상관을 자각적 무상관과 영탄(詠嘆)적 무상감으로 구별하면서, 불교적 세계관의 무상관이「あはれ(비애)」와 「はかなし(덧없음)」라는 감정과 결합되면서 영탄적 무상감으로 기우는 점에서 일본적「무상」을 읽어냈다. 가메이 가츠이치로 역시, 사상(思想)이어야 할 무상관이 일본에서는 감정화한 무상감이 변질되어, 그것이 비애로, 더 한층 나가서는 미학적 감각으로 수용되었다라고 말한다. 필자는 일본 중세 문학에는 문외한이지만,「무상」이 사상(事象)의 객관적 속성에서가 아닌 주체의 정의(情意)로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 일본적 무상의 특징이 있다는 지적은 침잠해서 생각해 본다면,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의 지평에서, 새롭게 구어역과 신개역, 신공동역을 비교해 보면, 양자의 차이가 보다 선명해 진다. 정서적 요소를 삭제한 전자의 번역문에서의,「공(空)」은 사상(事象) 모두의 실상(實相)을 드러내 술어로 제시된다. 모든 사상(事象)은 무가치하며, 무의미하고, 일시적이다라는 저자의 세계관이 거기에 표명되고 있다고 이해한 것이다. 그에 반해서, 후자의 번역문 「무어라 할 수 없는 허무함, 무어라 할 수 없는 허무함, 모든 것은 허무하다」의 「허무함」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저자의 감정이 감돈다. 모든 사상(事象)을 자각한 눈으로 관조하는 저자의 논리적 귀결이기 보다는, 그러한 저자를 엄습하는 공막감에 대한 감상적인 표백으로 그것은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게 되면,「허무함의 허무함」에서 「무어라고 할 수 없는 허무함」으로 번역될 때, 번역 기술상의 개정으로 보이는 문장 변경에서도, 사실은 무상관(無常觀)을 무상감(無常感)으로 수용하는 일본적 감성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는가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새로운 번역문장 쪽이 일본인의 마음에 보다 심층적 울림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저자의 감회를 토로한 말인지 어떤지는, 「코헬레트의 말씀」전체에서 새롭게 검토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인 것이다. 

3. 나오는 말  
  
히브리어 구약성서는 기독교의 성서로서 각 나라 말로 번역되어 기독교의 경전으로 읽혀져 왔다. 그러나 성립사적으로 보면, 헤브라이즘으로 불리는 그 신앙과 사상은 벌써 기독교 이전에 형성되고 있었고 거기에서 유대교가 성장하고, 기독교도 탄생하였다. 또한 이후의 이슬람에 대한 영향도 놓칠 수 없다. 구약성서는 성서일 뿐 아니라, 인류의 고전이기도 하다. 이을 통해서 사람들은 헤브라이즘의 진수를 접한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오늘날의 동아시아에서 볼 때, 시공(時空)이 아득히 먼 세계에서 성립되었으며, 언어 체계가 완전히 다른 히브리어로 기록된 서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한국어로 혹은 일본어로 바꾸려고 할 경우에는, 한국적인 혹은 일본적인 사유와 감성이 그 번역작업에 섞이는 일 또한 피하기 힘든 숙명일 것이다. 번역이란 다 그런 것이다라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구약성서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문화사적 의의가 일본에 있어서의 헤브라이즘과의<조우>에 있다고 한다면, 일본적으로 이해된 일본어역에서는 그러한<조우>는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 틀림없다. 동일한 현상이 어쩌면, 여기 한국어역에서도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성서를 본다는 것은, 성서 사상을 서구적인 해석에서 일단 해방시킨다 측면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성서 본문을 <동아시아화>한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일본어역 성서의 경우를 들어, 그러한 예의 일정한 부분을 소개했다. 동아시아의 전통이 헤브라이즘과의 진정한 만남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성서 연구자가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될 과제가 적지 않은 것이다.   



1) 일본어 번역 성서의 역사에 관한 이하의 기술은, 주로, 에비사와 아리미치 「日本の 聖書, 聖書和譯の歷史」(증보판, 일본 기독교 출판국, 1981년)에 의한다. 
2) 「천지개시의 사건」은 이와나미서점판(岩波書店版) 「日本思想體系 25」에 수록. 
3) 오래 전에는, 「밥티스마」의 역어를 시작으로 하는 용어 문제 때문에, 독자적인 번역으로 발간된 침례파의 신약성서(「志無也久 世無志与」1879년)가, 전후에는, 카톨릭의 입장을 선명히 한 바르바로역「신약-구약성서」(1964년)나 프로테스탄트 복음파의 입장에 선 『성서(新改譯)』(1970년)이 그러했다. 
4) 개인역을 제외하면, 전전부터의 문어역에 대한 구어역성서(1955년)는 무엇보다도 구어로서 읽기 쉬움을 중시했다. 한편, 신공동역은 그 기본방침을 「원문을 완전하게 재현하기 위해서」(서문)라고 명기하고 있다. 
5) teshuqah의 용례는 그 밖에 창4:7과 아가7:11절 뿐이다. 어근 SHWQ에는 SHQQ 「(목이) 마르다」와의 관련에서「허덕이며 요구하다」라는 의미를 상정하고 있지만, 그것도 확실하지는 않다.「상념」이나「동경」(70인역「. . .」)이라고 하는 의미는 문맥상의 상정일 뿐이다. 
6) 「新共同譯 舊約 聖書 註解 (1)」(日本基督敎團 出版局. 1996년), 31쪽. 
7) 「임신」이 「성욕」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라는 설명은 라빈설에 의거한 세키네 마사오역「창세기」(이와나미 문고, 개정쇄)의 주석부분의 차용이 아니라면, 최근 히브리어 사전(HAL, 3.  Aufl., S.  246; DCH II, p.592)의 부주의한 인용인 것이다.「임신하다」의 원어 헤-론-은 구약성서에서는 이 구절에만 사용되고 있는 단어이며, 어형론적으로는 동사「임신하다」의 하-라-의 파생어인 하-론-과 헤-라-욘의 혼합형, 또는 헤라-「임신하다」의 2차적 파생형이라고 이해되어져 왔다(70인역은 「신음」). 라빈(Rabin)은 그것에 대해서 우가릿 문서 중의 동사 hrr( 용례는 KTU1. 12.39의 한 구절만)의 의미를 대어(對語)동사 ?md 「욕구를 가지다(to desire)」와 동일하게 간주하며, 여기에서 헤-론-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Ch.  Rabin, Studiea in the Bible, 1961, p.390). 이 논의는, 그 후, 우가릿 학자 다후드(Dahood)에게로 계승되어 최근의 히브리어 사전에 헤-론-의 항에 하나의 학설로 실리게 되었다. 우가릿어 hrr에 「욕구를 가지다」라고 하는 의미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다른 견해도 있음), 그것이 「성적 욕구」를 나타내는가의 여부는, 히브리어의 헤-론-이 이 어근에서 파생되었는지의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판단을 유보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 불확실한 가설을 인정하게 된다면, 헤-론-은 「임신」이 아니라,「성욕」을 의미한다라고 주석했서야만 했다. 독일어의 히브리어 사전(HAL,3. Aufl., S.246)은, 이것과는 별도로, 유대교 히브리어의 동사 히-루-헤-루「생각하다/기도(企圖)하다」에「생각하다(성적인 의미에서도)」를 첨부하여, 성서 아람어 하루호-르에 「감각적인 욕구」(Sinneslust)라는 역을 붙이고 있다. 그러나, 이 동사의 기본적 의미에는「성욕」은 포함되지 않는다. 
8) 「新共同譯 舊約 聖書 註解 (1)」(日本基督敎團 出版局. 1996년), 39쪽. 
9) 그 밖에, 호 4:1-3, 미 7:13, 렘 23:10, 사 24:4-5, 겔 12:19 등. 
10) 「타락 하여」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SHCHT)의 기본적인 의미는 「파괴한다.」에 해당하며, 거기에 도덕적으로 함축된 뜻은 없다. 11절의 가장 첫 문장은 「땅은 신의 앞에 파괴되고 있었다」라고 하는 것. 즉, 벌써 홍수 전, 땅은 인간의 폭력적이고 포학함에 의해 파멸에 직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1) 최초로 「마음」의 문제를 좇았던 예언자는 호세아이며, 예레미야는 이것을 계승하고 있다. 보다 엄밀하게 예레미야서에 있어서의 「마음」의 용례가 예레미야 자신의 용법인지, 신명기역사가적 편집자의 용법인지 확인 할 필요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예레미야서의 「마음」의 용법을 문제삼는 것이므로, 예레미야서의 편집 역사적 문제로는 들어가지 않는다. 
12) 아카드어에서는 동일한 표현으로 「키 큰 사람(arku)과 같이 키작은 사람(kur)도」가 사용된다 
    (The Epic of Erra, V, 26). 
13) 직업상의 「지위, 입장」을 나타내는 말에는 아마드(‘amad) 「서다」의 파생어 마아마드(ma‘amad)가 있는데, 용례는 사 22:19, 대상 23:28, 대하35:15 뿐이다. 
14) 비교적 최근의 논의는, 예를 들어, T.  Zimmer, Zwischen Tod und Lebensgluck: Eine Untersuchung zur Anthropologie Kohelets, BZAW 286 (1999), S.  25-32. 
15) 唐木潤三 『無常』(筑摩書房, 1964년), 龜井勝一郞 『日本人の美と信仰』(大和書房, 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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