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제네바 학살? 역사적 무지로 인한 오해”
김진영 기자 jykim@chtoday.co.kr | 김진영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성당문에 로마 카톨릭을 비판한 95개조 반박문이 걸린다. 역사적 순간이었다. 하나님은 마르틴 루터의 손을 빌어 새 역사를 여셨다. 종교개혁, 그 위대한 순간의 시작이다.
시간이 흘렀다. 2017년, 500주년을 맞는다. 분위기는 고조되고 있다. 루터의 고향 독일을 비롯해 네덜란드, 스위스, 미국, 캐나다 등 세계 곳곳에서, 역사를 준비하고 있다. ‘리포메이션 500’(Refo 500)이라는 깃발을 올렸다. 불은 아시아에도 붙었다. 그 가운데 한국이 있다. 총신대학교(총장 정일웅)를 중심으로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모여 지난 달 ‘Refo 500 아시아’를 출범시켰다.
총신대 안인섭 박사(교회사)가 Refo 500 아시아의 프로젝트 매니저다. 그에게 Refo 500의 의미와 목표를 물었다. 500년 전 종교개혁은 지금, 위기의 교회에 무엇을 말할까. 21세기의 종교개혁, 과연 가능할까. 더불어 물음을 던졌다. 한국 장로교의 대부, 종교개혁의 또 다른 기둥, 칼빈도 빼놓을 수 없었다. 안 박사는 한국칼빈학회 직전 회장으로, 현재 명예회장이기도 하다.
▲안인섭 박사는 Ref0 500 아시아의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고 있다. 그는 “종교개혁은 본질을 확인하게 한다. 그 본질은 성경이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 그래서 우리의 신앙을 개혁하자는 것이 곧 종교개혁이 이 땅의 교회에 던지는 메시지”라고 말했다. ⓒ김진영 기자 |
종교개혁 500주년, 개신교 본질 확인할 수 있는 기회
-Refo 500이란 무엇인가.
“오는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국제적인 사업이다. 네덜란드에 본부를 두고 있다. 앞으로 학술 컨퍼런스와 강의, 전시회, 콘서트, 출판 등 다양한 영역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의 의미를 알리고 홍보해갈 것이다. 한국에서도 여러 신학교와 출판사, 교회 등이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궁극적으로 무엇을 알리려 하나.
“500년 전 종교개혁이 이 시대, 여전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사건이라는 걸 전하려 한다. Refo 500의 특징을 연결(Connection), 협력(Collaboration), 질적 우수성(Quality)이라는 세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16세기의 종교개혁과 21세기의 오늘을 ‘연결’하고, 이를 위해 서로 ‘협력’하며, 최고의 수준으로 사업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핵심은 연결이다.”
-500년 전 종교개혁이 왜 이 시대에 중요한가.
“종교개혁으로 지금의 개신교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2017년이 500번째 생일이다. 교회가, 기독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처음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다. 나는 누구이며 과연 제대로 살고 있는가. 종교개혁은 이렇게 본질을 확인하게 한다. 그리고 그 본질은 성경이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 그래서 우리의 신앙을 개혁하자는 것이, 종교개혁이 이 땅의 교회에 던지는 메시지다.”
-종교개혁은 단지 교회에서의 사건만은 아니었다.
“물론이다. 종교개혁은 서구 사회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했다. 그야말로 세계사적인 사건이었다. 이런 면에서 Refo 500은 과연 오늘날 우리가 민족과 세계를 변화시켰던 선배들의 모습을 이어가고 있는가를 반성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성경에 충실하며 복음의 본질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그래서 시대의 정치와 경제, 문화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지 되짚어보는 장이 될 것이다.”
칼빈주의, 칼빈을 숭배하는 것 아니라 존중하는 것
-종교개혁을 말할 때 칼빈을 빼놓을 수 없다. 보수적 장로교가 우세한 한국에선 더더욱 그렇다. 왜 칼빈이 중요한가. 지나친 칼빈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나 역시 칼빈을 알기 전에는 유독 ‘칼빈, 칼빈’ 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예수와 성경이 아닌 칼빈이냐’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칼빈을 공부하고 그를 점점 알아가면서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건, 소위 칼빈주의라고 하는 것이 결코 칼빈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차원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그의 가르침과 행적을 존중할 뿐이다. 가톨릭만 보더라도, 여전히 많은 성인들이 있어서 그들의 이름으로 기도까지 한다. 칼빈주의자들이 가톨릭처럼 칼빈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칼빈을 말하는 건, 그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감에 있어 정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Refo 500의 목표가 과거 종교개혁 시대와 지금을 연결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칼빈 역시 종교개혁과 오늘의 교회를 이어주는 핵심적인 매개체 중 하나다. 루터가 구원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하늘의 문을 열었다면 칼빈은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했다.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연 셈이다. 칼빈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가장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답을 제시했다. 사회와 더불어 살아가는 오늘날 교회는 그로부터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한국에서 칼빈을 따르는 많은 자들이 대부분 보수권에 있다. 칼빈은 보수적 인물인가.
“꼭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칼빈 이후 유명한 정치 철학자 두 명이 있었다. 홉스와 밀턴이다. 이 둘은 정반대의 정치 철학을 갖고 있었다. 홉스는 군주, 혹은 국가의 통치를 지지했고 밀턴은 개인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런데 홉스와 밀턴 모두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칼빈을 근거로 들었다. 그만큼 칼빈의 가르침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를 비롯해 이 시대 많은 그룹들이 존재하는데 엄격히 말해 모두가 칼빈의 후예다. 칼빈을 알지 못하면 근대를 이해할 수 없다.”
칼빈은 사람들 학살할 만한 정치적 위치 아니었다
▲안 박사는 “칼빈이 제네바에서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주장은 그를 반대하는 이들의 유언비어이며, 역사적 무지로 인한 오해”라고 지적했다. ⓒ김진영 기자 |
-칼빈이 스위스 제네바를 통치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주장이 있다.
“역사적 무지로 인한 오해다. 그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은 대부분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이 지어낸 유언비어다. 이들은 16세기 칼빈에 의해 징계를 받았거나 권징을 받았던 사람들인데, 칼빈에 대한 악의로 그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을 퍼뜨렸다. 객관적으로 신빙성이 없다. 제네바에서의 칼빈은 정치적으로나 법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아무런 권한을 갖지 못했다. 이는 당시 제네바의 정치체제나 행정체계만 알아도 금방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게다가 칼빈은 스위스인이 아닌 프랑스인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난민이다. 제아무리 위대한 종교 지도자라 한들 난민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진 상태에서 학살을 일삼을 수는 없다. 실제 칼빈은 한때 정치적 입지가 좁아져 제네바 밖으로 추방되기도 했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정치적 위치를 강화할 수 있었던 때는 그가 죽기까지, 딱 9년 간 뿐이었다. 피선거권이 없는, 3등급 제네바 시민권을 얻은 것도 죽기 5년 전 일이었다”
-칼빈의 예정론, 이른바 ‘이중예정’도 논쟁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칼빈의 예정론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질문은 아마 두 가지로 요약될 것이다. ‘개인의 행동이나 삶의 모습과 관계없이 누구는 날 때부터 천국으로, 누구는 지옥으로 가도록 예정됐느냐’는 것과 ‘구원이 예정된 사람은 정욕대로 악한 삶을 살아도 상관없느냐’는 질문이다. 우선 우리가 전제해야 하는 건,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이해하는 사랑의 모습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적이지 않다. 일방적이다. 그러므로 만약 내가 구원을 받았다면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라고 표현할 밖에는.
그럼 멸망으로 예정된 사람은 누구인가. 이것 또한 알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느 특정인을 멸망으로 예정된 사람이라고 판단하거나 차별할 수 없다는 의미다. 칼빈은 눈에 보이는 공동체, 즉 가시적 공동체가 있는가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공동체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교회를 비가시적 공동체, 곧 영적인 공동체로 정의했다. 이는 아무리 신앙적으로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의 겉모습만을 보고는, 그를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이라 단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겉모습이 신앙적이지 않다 해서 그를 멸망으로 예정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다. 칼빈은 구원을 논함에 있어 내적인 소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칼빈은 예정을 말하면서 성령의 사역을 강조했는데, 누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마음에 깨달았다면 여기에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었던 것이라고 칼빈은 말한다.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 부분과도 같은 맥락이다. 칼빈은 이것을 예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예정은 어떤 수학공식처럼 기계적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일하심이 동반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방종의 삶을 살 수 없다. 예정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수 없고, 예정에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이라면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함부로 사는 사람은 심각하게 다시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내가 정말 예정됐을까’라고.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일이다.
또 하나, 우리는 칼빈의 예정론이 어떤 문맥에서 등장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칼빈은 대부분 자신이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서 이 예정론을 강조했다. 자신에게 닥친 절망과 고통을 구원의 확신을 통해 극복해 나가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칼빈의 예정론은 선택된 자의 자기 확신과 소망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선택과 유기(遺棄)를 구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 500주년, 이제 6년 정도 남았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지금 한국교회가 여러 면에서 성경으로부터 많이 이탈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고 종교개혁의 정신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이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앞으로 6년 여 동안 의미 있는 대화가 이뤄지길 바란다.”
안인섭 박사는
고려대학교 사학과(B.A.)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했다. 네덜란드의 Kampen Theological University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Refo 500 아시아 프로젝트 매니저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칼빈학회 명예회장직을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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