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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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이승구

 

 

 

1. 이끄는 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세계관(world-view)이라는 말은 이 세계를 바라보는 눈, 즉 세상을 보는 관점(perspective)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있다고 보는가에 관한 문제가 세계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좀더 구체화하면서 월터스는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서 갖고 있는 기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이라고 잠정적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이렇게 세계관이란, 왈쉬와 미들톤이 말하는 대로, "지각의 틀(perceptual framework)이며, 사물을 인지하는 방식"이고, "삶에 대한 시각(vision of life)"이요, "삶을 위한 시각(vision for life)"이다. 또는 호페커가 말한 바와 같이, "실재에 관한 어떤 사람의 전제들과 확신들의 총합으로, 이는 삶에 대한 그의 전체적 관점을 표현하는 것이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세계관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이 세상을 볼 수 없는 분들도 그 나름대로 이 세상에 대한 관점과 이해를 지니는 것이다). 이 세계에 대한 그 나름의 관점, 그 나름의 이해가 각자의 세계관이다.

 

그러므로, 제임스 사이어와 같이, "어느 시대의 세계관의 수는 그 시대에 사는 의식적 존재의 수만큼이나 많을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고, 그것들에 대해 심각하게 성찰 한 후에 그 다양한 세계관들이 일정한 유형들로 구분이 가능함을 생각하면서 "세계관의 수는 무한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 세계관이 전혀 문제(a poria)가 되지 않는다. 그저 나름의 관점에서 나름의 이해를 가지고 이 세계 안에서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는 세계관에 대한 질문과 탐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문제가 안된다. 그러나 이런 상태에서도 세계관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의식되지 않는 세계관"을 일상적 세계관 또는 생활 세계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또는 내재적 세계관, 암묵리의 세계관(implicit world-view)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관에 대한 질문과 탐구는 이런 생활 세계에 있는 의식되지 않는 세계관을 의식하는 것 또는 그것을 문제로 삼는 것이다. 즉, 단순하고 소박하게 생각할 때는 매우 당연한 것들로 여겨지는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묻는 것 또는 우리의 암묵리의 세계관을 검토하고 평가하는 일이 세계관의 문제이다. 이는 무의식적 세계관에 문제를 제기하는 문제제기인 것이다. (철학을 하시는 분들은 이것이 철학적 질문과 무엇이 다른가고 물을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같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관에 대한 질문과 탐구는 전문적 철학자가 하는 작업 같이 복잡하고 기술적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홈즈가 제안한 '철학자들의 철학'과 '세계관적 철학'의 구별을 참조하고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세계관적 철학은 "철학자들의 철학의 결과를 세계관과 세계관 내의 특정한 주제들을 형성하고 평가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관은 좀더 일반적인 것으로 철학에 비하면 덜이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왈쉬와 미들톤은 아예 "세계관은 실재의 전체성에 대한 전이론적(前理論的) 견해"라고 하고, 철학은 "실재의 전체성에 대한 이론적 견해"임에 비해서, 각 학문 분과는 "실재의 어떤 측면에 대한 이론적 견해"라고 말하고 있다. 월터스도 "철학과 신학은 학문으로서 학문적이며 이론적인데 반해서 세계관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관은...전학문적이다."고 말한다. 물론 암묵리의 세계관, 비의식적인 세계관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시화된 세계관은 전문적인 철학 같이 이론적이며, 학문적이지는 않으나, 어느 정도는 이론적이고 학문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홈즈와 같이 전문적 철학자나 신학자가 하는 전문적 철학이나 전문적 신학과 비교되는 세계관적 철학과 세계관적 신학을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외현화된 세계관은 세상이 실재로 있다고 보느냐, 그냥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보느냐, 그렇게 보이는 그것 자체가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이라고 보느냐, 아니면 별로 의미 없는 것이라고 보느냐 등등의 복잡한 문제를 묻는 것이다. 따라서 외현화된 세계관은 그저 관점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가 가진 관점에서 이해한 내용을 어느 정도는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기독교 세계관(Christian world-view)이란 그리스도인이 가진 세계관(Christian's world-view)을 뜻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그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이해한 내용 - 그 둘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런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존재하고,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보다 중요한 질문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세계관도 일반적으로는 그저 그의 의식 가운데 암묵리의 세계관(implicit world-view)으로 있을 뿐, 외현적인 세계관(explicit world-view)으로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을 문제 삼고 논의하고 말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인 안에 있어서 그의 이 세상에서의 삶을 인도하는 세계관을 좀더 명확히 하고 외현화시키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안에 암묵리에 있는 세계관을 이끌어 내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전하고 바른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도리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잘 배워온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세계관 공부를 하거나 이에 대한 연구를 한 일이 없어도 평소에 자신들이 힘써 해 오던 바가 바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말하려는 바라고 느끼게 되는 일이 많은 것이다. (특히 세상과 우리의 삶 전체에 미치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사상에 충실한 교회의 교우들에게는 더욱 더 그러하다.

 

예를 들어서, 카이퍼의 칼빈주의는 결국 기독교적 인생관과 세계관에 충실하며, 그에 대한 깊은 탐구를 이끌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을 말하고 주장하는 것은 이전에는 없던 어떤 새로운 것을 말하거나 주장하는 것이 전혀 아닌 것이다. 그것은 그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음에 도리에 충실한 사고를 깊이 있게 폭 넓게 하자는 것, 또는 그렇게 해 오던 바를 좀더 명확히 언표하고 외현적으로 드러내 보자고 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외현화하는 것을 때때로 "세계관을 가진다"고 표현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논의를 같이 해 온 분들은 이런 표현은 그리 좋은 표현이 아니라는 것에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외현화하지 않아도 이미 그 세계관은 암묵리에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손봉호 교수님께서는 "세계관이나 그 배경을 이루는 종교적 신앙이 항상 의식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의식되지 않은 세계관이 구체적인 삶과 행동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고도 표현하신 일이 있다. 의식 있는 신실한 기독교인의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기독교 세계관을 명확히 외현적으로 표현하도록 하려는 것인가? 이 문제를 다음절에서 다루기로 하자.

 

 

2. 우리는 왜 기독교 세계관을 외현화시키려고 하는가?

 

1) 우리가 지지할 수 없는 이유들

일반적으로 세계관을 외현화할 때 (위에서 말했듯이, 사람들은 때로 이를 "세계관을 가진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동기에서 그리하는 것 같다. 첫째는 단순한 호기심이란 동기이다. 일반적으로는 이것이 어떤 질문을 하고 탐구를 해 나가는 일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동인이다. 여유와 호기심이 없이는 실용적이지 않은 연구나 탐구는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호기심 그 자체에 이끌려 가면 우리는 끝없는 방황을 할 뿐, 어떤 진전이나 유의미한 열매를 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 아주 놀라운 발견을 하거나 굉장한 것을 이룬 이들은 다 이 호기심 자체에 의해서 움직여 나갔음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뛰어난 분들의 호기심에 가득찬 시도들에 대해 개방적이어야 하고 그런 시도의 여지를 항상 열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세계관을 외현화시킬 때 그것이 그저 호기심에 이끌려 하는 작업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이상의 어떤 본유적인 동기가 여기에 작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세계관을 외현화할 때 그들이 가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세계 내에서 그들이 느끼는 불안(anxiety or dread)과 연관되어 있다. 이 세상 안에 내 던져진 존재(das Geworfenheit)로 자신을 느낄 때 가지게 되는 그런 불안 가운데서 사람들은 여러 자지 안전 장치와 안전 보장을 마련하려고 하게 된다. 그런 안전 보장에 대한 추구 중의 하나가 이 세계의 정체를 확인하고 그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서 안심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불안과 염려를 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맡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동기가 작용하여 그들의 세계관을 외현화시켜 보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 되며, 그들의 존재 방식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2) 기독교 세계관을 드러내고 외현화하는 진정한 이유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왜 그들의 세계관을 명확히 하는 일을 해야 하는가? 그 첫째 이유는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의 존재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와 그 과정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고 바르게 반응해야 하는 일에로도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깊이 생각하라"는 것이다. 자신이 이전에 어떤 존재들이었으며,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어떤 사람들이 되었으며, 따라서 하나님과 세계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과, 다른 피조물들에 대해서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요구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자신들의 세계관을 잘 표현해 내는 일은 자신의 그리스도인 됨의 중요한 한 측면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인지적인 측면에서도 잘 드러내도록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을 진술해 보려는 노력도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알고 드러내려는 노력의 일완인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이론적 동기(theoretical motive)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세계관을 명확히 해 보려고 하는 이유는 이 세계가 바로 그들이 관련하여 살고 활동해야 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즉, 세계 안에서의 실천과 활동이라는 실천적 동기(practical motive)가 작용해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세계관을 외현화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더 홈즈는 "세계관은 행동의 지침으로서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 이와 연관된 세계관의 필요성으로 "사유와 삶을 통일시키기 위해서, 선한 생활을 정의하고 인생의 희망과 목적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말하고 있다. 아마도 이와 비슷한 이유에서 월터스는 "나는 세계관이란 우리 삶의 인도자의 기능을 한다고 믿는다"고 말한 듯하다.

 

브라이언 월쉬와 리쳐드 미들톤도 자신들이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강의를 하고 이에 대한 책을 쓰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목표는 성경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세속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순종의 삶을 살도록 유도하는 통일된 기독교 세계관을 학생들이 계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 하면, 그들에 의하면, "하나의 세계관은 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서 (in the World) 지향해 나갈 세계의 모델(model of the world)을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의 제대로 된 실천, 바른 실천(orthopraxis)을 위한 이론적 작업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을 명확히 드러내며 표현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기독교 사상의 영향력은 기업과 정치, 문학과 예술, 학문과 교육, 가정과 삶 전체의 도덕적 성격, 그리고 온 세상의 모든 부분에까지 미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을 외현화하는 이 작업은 철저히 이론적이며 실천적인 것이다. 마치 이상적인 신학이 동시에 아주 이론적이며 아주 실천적인 학문이듯이 말이다. 이론적 관심과 실천적 관심이 동시에 작용하지 않으면 참된 그 무엇을 결코 내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을 명확히 표현해 내는 일에 있어서도 철저히 이론적이려고 해야만 하며, 동시에 실천적인 관심을 반영해야만 한다.

 

기독교 세계관의 이런 실천적 성격에서 나오는 또 하나의 이유로 이 문제 투성이의 어려운 시대에 현대 정신의 혼란 상황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그리고 이 혼란에 빠진 동료 인간들을 위해 참으로 정합적이고 바른 세계관을 제시해야 할 필요성과 사명을 그 어느 때 보다 더 심각하게 느껴야 한다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오늘날 유행처럼 번져 가는 포스트 모던적 상황 가운데에서는 이런 상황과 시대적 요청이 기독교 세계관을 명확히 현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3. 기독교 세계관의 특징들: 그 관점의 특성들을 중심으로

앞으로 우리가 충실히 드러내고, 표현하며, 외현화하려고 하는 기독교 세계관은 과연 어떤 특징을 가질 것인가? 이것도 여러 측면에서 여러 가지로 제시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그런 세계관을 가능하게 하는 기독교적 관점이 과연 무엇이고, 그런 관점의 특성들이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다음 세 가지 특징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중생자의 영적인 세계관

첫째로, 기독교 세계관은 중생한 사람들의 영적인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세계관을 외현화한 것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은 중생하지 아니한 자들의 다양한 세계관들과 대립적이고, 반립적인(anti-thetical) 세계관인 것이다. 그 둘 사이에는 타협과 절충의 여지가 전혀 없다. 이 때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비기독교적 세계관들이 어떤 점에서 함께 기독교 세계관에 반립하여 서 있으며, 어떤 점에서 각기 다른가 하는 문제에 아주 민감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당히 다른 것들을 그저 뭉둥 그려 동일시하는 실수와 그렇게 한다는 비판을 받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비기독교적 세계관을 깊이 탐구하고 기독교적 세계관과 비교하는 일이 언젠가는 있어야만 한다.

 

일단 여기서는 다른 모든 세계관들과 기독교 세계관을 구별하는 하나의 요소로 기독교 세계관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초자연주의(supernaturalism)의 입장을 지니는 데 비해서, 모든 다른 세계관들은 결국 자연주의(naturalism)나 반초자연주의(anti-supernaturalism)의 입장을 지닌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여기서 형식적으로는 기독교적이려고 하되 실질적으로는 기독교적이지 않은 입장들이 과연 어떤 것인지가 잘 드러날 수 있다. 형식적으로 기독교적이려고 하는 입장들은 대개 초월과 초자연을 말하고 인정하기는 하지만 대개는 그 초월과 초자연이 참된 초월과 초자연이 아니든지, 아니면 자연 내에 있는 초월이나 초자연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독교적 입장만이 참된 초자연주의를 지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진정한 초자연주의는 그저 자연적인 것을 넘어서는 것을 인정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고,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인정하는 성경의 하나님과 그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점을 말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영적인 세계관이기도 한 것이다. 중생이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기에, 또한 중생에서 발생하는 모든 인지적 변화도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발생하며, 이 세계관에 따라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성령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이기에 중생자의 세계관은 영적인 세계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기원과 진술 과정과 그 결과가 모두 다 성령 안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관점은 근본적으로 영적 관점(spiritual perspective)이다.

 

2) 성경적 세계관

중생자의 영적 관점은 결국 이 세상을 성경의 빛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도록 한다. 월털스토르프가 잘 표현한 바와 같이 "진정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성경의 세계관을 채택하는 신앙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적 관점(bibilical perspective)을 가지고 세계를 보는 성경적 세계관일 수밖에 없다. 월터스가 말하는 대로 "우리의 세계관은 성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점검되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성경적 근거에 의해서 형성된 세계관을 가져야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성경만을 보거나 그 자료만을 사용해서 세계관을 구성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과 이 세상에 주어진 하나님의 일반 계시 모두를 다 중시하며, 다 사용하여 그들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작업을 할 때에 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성경이 제시하는 관점을 가지고서 이 세상의 일반 계시를 보고 해석하는 것이다. 성경 계시의 빛 비취임을 받은 사람만이 일반 계시를 비로소 제대로 보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관점은 근본적으로 성경적 관점(biblical perspective)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관점이 진정으로 성경적인 관점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성경이 과연 어떤 책인지를 분명히 해야만 한다. 만일에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인간의 최고 지혜를 집대성한 책으로 여기면서 이렇게 이해한 성경에 근거해서 그의 세계관을 구성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경적 세계관도 아니고, 기독교 세계관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어떤 절단선을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성경적 세계관이 제대로 된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contain)는 구자유주의(old-liberalism)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면, 진정한 성경적 세계관을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성경은 철저히 인간의 말이지만 성령께서 역사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become)고 하는 바르트주의의 입장에 서서 성경의 관점을 말하는 것은 과연 성경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필자는 그럴 수 없다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성경이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의 내적 증거가 있을 때에 우리가 이 객관적 하나님의 말씀을 주체적으로도 받아들이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성경을 제대로 받아들인 사람은 성경이 객관적으로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입장은 성경에 대한 역사적 비평(historical criticism)과 이를 포용하는 모든 비평 이론들과 성경에 대한 그런 접근들을 승인하지 않는 것이다. 후에 성경의 내용을 가지고 작업할 때에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지가 여기서 규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성경적 관점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무오한 성경에 근거해서 세상을 보는 이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피조계로 보며, 그 피조계가 일정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왔다고 본다. 피조된 이 세상의 역사적 과정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그 피조계의 타락과 구속이다. 그런데 그 구속도 역사적 과정을 걸쳐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성경적 세계관은 구조적으로는 역사적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결국 성경적 관점은 구속사적 관점(redemptive historical perspective)이 되는 것이다.

 

3) 신국적 세계관

그런데 성경이 제시하는 구속사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 즉 '하늘나라'[天國, kingdom of heaven])를 지향하고 있으며, 그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과 관련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때를 종말(終末, eschaton)로 여기던 히브리적 관점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하였을 때부터,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치시며 메시야적 사역을 하실 때부터가 '종말'이다. 그러므로 이런 입장에서는 신약 성도들의 관점은 결국 이런 의미에서의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종말이 임하여 왔다는 의미에서의) 종말론적 관점(eschatological perspective)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의 셰계관도 종말론적 세계관인 것이다. 시기적 특징을 밝혀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기독교적 관점은 그 내용에 있어서는 그 종말의 시기에 이미 임하여 왔고, 그러다가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극치에 이를 그 하나님 나라 중심의 관점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제 모든 것을 신국적(神國的)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의 판단 기준은 신국의 가치이고, 그의 모든 것이 천국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4.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적 구조--그 역사적 성격

우리는 이미 기독교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역사적 세계관이고, 따라서 구속사적 관점(redemptive historical perspective)으로 이 세상을 보는 것이라는 것을 말했다. 이것은 거듭 강조되어야 하니,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구조가 역사적 과정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 과정의 내용은 후에 기독교 세계관을 구성하는 일에 있어서 좀더 상세히 설명되면서 이 틀에 따라서 세계에 대한 이해가 제시될 것이다. 우선 이 역사적 과정을 간단히 더듬어 봄으로써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구조와 틀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창조(Creation)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에 의해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창조 사실은 기독교 세계관의 근본적 기초이다. 이 세상이 그저 있게 되었다거나, 우연히 있게 되었다고 하는 이들은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창조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는 좀더 조심스럽게 물어져야할 질문이다. 한마디로 하자면, 역사적 창조(historical creation)를 받아들여야 성경적 의미의 창조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에 창조란 그저 이 세상이 여기 있음에 대한 신앙적, 신학적 의미를 표현하는 말일뿐이라고 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성경적 의미의 창조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일 것이다. 그에게는 창조가 개념이나 의미일 뿐 전혀 역사적 사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창조의 사실을 받아들이지만 이 세계가 창세기의 창조 기사가 기록하고 있듯이 그런 과정을 거쳐서 창조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 여기서 위에서 성경적 관점에 대해서 말하면서 어떤 성경관을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중요한 선결적인 문제라고 말한 이유의 한 면이 드러나는 것이다. 창세기 기사에 대한 역사 비평과 문학적 비평을 용인하는 입장에서 창조를 받아들이는 이는 과연 성경적 세계관의 토대인 창조를 받아들인 것일까? 필자에 입장에서는 이에 대해서도 "아니오"라고 말하는 입장을 견지해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인간 가운데서는 이 세계가 창조되는 것을 본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그렇게 때문에 창조는 역사의 한 부분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인간 중심적인 태도가 아닌가? 우리는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계시하셨다면 그것까지를 역사 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선진들도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고,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는 것이다"(히 11:2, 3). 그러므로 역사적 창조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 어거스틴의 말대로 창조와 함께 시작된 "시간과 함께 하는"(cum tempore) 창조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창조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2) 타락(Fall)

따라서 우리는 타락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해야 한다. 즉, 역사적 타락(historical fall)을 믿지 않는 이는 실질적으로 타락을 믿는 이로 여길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과 공간과 같은 시간, 공간 내에서 오래 전의 역사의 어느 순간에 인간의 타락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타락이 없이 창세기 3 장의 이야기는 그저 모든 사람에게 일어안 일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나 신화적 표현이라고 보는 것은 기독교 세계관의 두 번째 구성 요소를 상실한 것이다. 또 인간의 타락은 사실 이 시공간 내에서 일어 난 것이 아니라 영원에서 영혼의 타락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생각도 옳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3 장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것이 역사적 타락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 사실성은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온 인류의 타락이 일어났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역사적 타락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지로 펠라기우스(Pelagius)와 그를 따르는 이들은 창세기 3 장의 역사성은 받아들이면서도 그로 말미암아 인간성 전반의 타락(fall)이 일어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이 다 노력해서 하나님의 뜻에 따를 수 있으며, 그렇게 자신들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름으로서 구원에 이른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펠라기우스주의는 이미 오래 전에 정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는 계속해서 인간의 온전한 (전적인) 타락을 믿지 않고,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면서 인간에게 남아 있는 힘을 이용해서 최선을 다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이 계속 나타난 것이다. 이는 온전한 의미의 타락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므로 온전한 기독교 세계관의 한 요소를 불분명하게 하는 입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3) 구속(Redemption)

그처럼 "죄와 허물로 죽은"(엡 2:1) 우리를 영적으로 다시 살리려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데,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서 이루어진 "구속"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신약 성경이 기록해 주고 있는 대로 이 세상을 사시다가, 성경대로 죽으셔서,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믿는 일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또한 이 삶과 죽음과 부활, 승천이 결국 우리의 구속을 이루는 메시아적 사역의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성경대로 믿는 것이 구속을 믿는 것이다. 이 구속은 결국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로 도입해 들이신 '하나님 나라"[天國] 백성으로 만들어 주시는 사건인 것이다.

 

4) 극치(Consummation)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그 "하나님 나라"[天國]는 예수님의 재림에서야 그 나라의 극치에 이르게 된다. 그 때까지는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 나라"[天國]가 성장해 가고 그 영향력을 온 땅에 미쳐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나라를 가져오실 분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시적이고, 인격적이며, 물리적인 재림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재림이 하나님 나라를 극치에 이르게 하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목적을 종국적으로 이룰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은 이런 과정을 걸쳐서 극치에 이를 하나님의 나라, 피조계의 미래를 바라며 이를 중심으로 한 세계 이해를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5. 결론

기독교 세계관이 이러한 특성과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살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1) 이 세계관의 구체적인 형상을 그려내는 것과 (2) 이런 세계관에 근거한 각 학문을 하는 구체적인 방법의 제시와 그 실천, 그리고 (3) 이런 세계관에 근거한 활동과 삶일 것이다. 이 세 가지 과제 가운데서 이 번에는 첫 번째 일(즉, 구체적인 기독교 세계관의 형상을 살피는 일)을 하려고 한다. 물론 이는 이미 우리가 위에서 인용한 바 있는 여러 책에서 시도된 일이다. 그러므로 다시 우리가 정리를 해야 할 필요가 무엇이냐고 반문하실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구체적 정황 가운데서 우리가 교재로 사용할 만한 기독교 세계관 책의 발간을 위해서 일종의 재정리 작업이 필요하다는 의식에서 다시 이 어리석은 일을 감행한다. 이 일에는 우리의 입장을 정합성 있게 드러내는 것과 우리와 다른 세계관들과 비교하는 일이 포함된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중의 첫 번째 것을 중심으로 정리하는 일을 하기로 한다. 때때로 다른 입장들과의 비교가 나타나기는 할 것이나 일차적으로는 우리의 입장을 잘 제시하는 식으로만 하기로 한다. 왜냐 하면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먼저 우리의 입장을 잘 정리하고 난 후에 다른 세계관의 입장과 비교하는 것이 독서나 강좌를 통해서 기독교 세계관을 명확히 하려는 이들에게 비교적 혼동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정리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소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기독교 세계관들" 가운데서 우리는 어떤 세계관을 우리의 "기독교 세계관"으로 제시하고 나아가야 하는 지가 비교적 현저하게 드러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제시할 입장은 결국 이원론적 세계관들과 대조되는 통합적 전망의 개혁주의적 세계관(Reformational Worldview)일 것이다. 즉, 우리의 이 정리 작업은 이 개혁주의적 세계관이 구체적으로는 어떤 방향을 추구하고 나아가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 될 것이란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제시하는 개혁주의적 세계관은 무오한 것이거나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될 것이다. 우리가 제시하는 기독교 세계관은 항상 성경과 이에 근거한 일반 계시를 더욱 깊고 폭 넓게 연구한 결과에 의해서 수정될 수 있는 개방성을 지닌 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영감되지 않은 인간의 모든 활동은 항상 오류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항상 개방성을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월쉬와 미들톤의 말을 유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떤 한 세계관이 문화를 지배하게 되면, 그 세계관은 다른 시각들이 그 사회 속에서 서로 겨룰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아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의 세계관으로 타당한지를 의심할 이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전체주의적 성격을 갖는 그런 시각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시각이 언제나 제한되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세계관은 언제나 - 다른 세계관에 의해서라 할지라도 - 수정과 순화를 받아들일 태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제시하는 기독교 세계관이 항상 성경에 대한 더 바르고 깊은 연구와 이에 근거한 일반 계시에 대한 연구의 빛에서 수정되어 점점 더 성경적인 세계관이 되어 가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개혁파 신학과 교회에 대해 하던 말을 변용해서 개혁된 세계관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월터스가 말하는 대로 "지속적인 개혁이란 성경에 의해 늘 개혁되고 (행 17:11; 롬 12:2을 보라) 전통을 무반성적으로 따르지 않는 것이다."

 

이런 개혁적 관점에 의해서 후에 좀더 온전하게 개혁될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면서 하는 이 정리 작업을 한 후에 다른 세계관들과의 본격적인 비교를 위한 작업이 뒤따르면 이미 정리된 우리의 세계관을 더욱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 강좌 시리즈 2 : 중생과 중생자의 세계관

 

                                               이 승 구

 

 

 

우리는 서론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특징 지우면서 이는 무엇보다도 중생자의 영적인 세계관이라는 것을 말한 바 있다.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중생이 무엇이며, 중생의 결과로 우리의 의식과 영혼의 기능의 어떤 변화가 일어나서 우리로 기독교 세계관을 갖게 하는지를 살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번 장에서는 중생이 무엇이며, 중생의 세계관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중생이란 무엇인가?

 

중생(重生, regeneration)이란 인간 존재의 타락을 전제로 하고, 이렇게 타락한 존재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며 살기 위해서 그에게 요구되는 영혼의 변화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런 용어는 신약 성경에서 조금은 폭 넓게 사용되었고, 이런 용례에 따라서 신학에서도 상당히 폭넓게 사용되다가, 17세기에 이르러서 좀 좁고 제한된 의미의 중생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제한된 의미로 사용된 중생은 시간 안에서의 사람들의 구원에로의 변화의 첫 단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런 개념의 중생의 의미에 의하면, 사람들은 중생에 의해서야 하나님과 제대로 된 관계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바르지 아니하므로, 이 세상에 대해서도 궁극적으로는 바르지 못한 개념을 가진 것이 된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며, 따라서 이 세상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자들인 것이다.

 

중생에 대한 신약 성경의 가르침 가운데서 요한 복음 3장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과 바리새인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중생의 필요성과 방법, 그 성격들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그가 밤에 찾아온 것으로부터 그의 연약한 마음, 교만함,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핌 등을 추론하고 그를 비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 그가 밤에 찾아 온 것이 그가 어두움과 육에 속해 있으며, 이 어두움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보여주려는 상징적인 일이었다고 보는 해석은 요한이 신비한 분위기를 묘사하기 위해 창작한 것이라는 불트만의 해석과 비슷하게 이 일의 역사성보다는 요한의 구성을 더 중시하려는 이상한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예수님과 함께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시간에 많은 시간을 내어 깊이 대화를 나누기에 좋은 시간이 밤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찾아와 가르침을 받으려고 한 것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서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생님으로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어떤 태도와 자세로 예수님을 찾아 와서 배우고자 하는지를 잘 알고 계셨다. 후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바리새인인 니고데모는 이제까지의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사유와 바리새인으로서의 활동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조금만 더 받아 더하기만 하면 종교적으로도 완성되고, 자신들이 이제까지 기다려 오던 하나님 나라도 잘 준비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한 듯싶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평가는 이제 하나님에게서 오신 선생님이신 예수님에게서 그의 가르치심을 받으면 되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나라에도 들어 갈 수 있고, 그 나라 백성으로 활동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니고데모와 같은 예수님께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나타내 보인 바리새인들의 공통적인 태도였을 것이다. 그들은 상당히 종교적인 자신들의 생각과 삶과 사고 방식, 그리고 지금 자신들이 생각하는 세계관이 그런 대로 괜찮은 것이라고들 생각했던 것이다. 카슨이 말하는 바와 같이, "니고데모가 다른 바리새인들과 같다면, 그는 자신의 전 생애가 씻혀지고 그의 마음이 변혁되며, 다시 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켜녕, 자신이 많이 회개해야 하리라고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자기 자신의 순종의 질에 대해 너무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니고데모의 이런 마음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그에 적절한 도전을 니고데모에게 던지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과 5절에 언급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pace Westcott). 그런데, 칼빈이 잘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 나라란 말로부터 [지금 하나님이 계신] 하늘(Heaven)을 생각하는 이들은 잘못된 것이다." 니고데모와 같은 배경과 확신을 가진 유대인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은 이 세대 끝에 나타날 그 나라에 참여한다, 영원한 부활 생명을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많이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영생이란 말로 대치되어 나타난 예가 더 많다. 특히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의 동일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그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즉 그들이 고대하는 영생에 들어갈 수 없다고 아주 단정적으로, 그리고 엄숙하게 선언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배우러 찾아 온 이 사람에게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기본적인 마음의 자세를 아시고서 그에 적절하게 반응하시는 것이었다. 그는 이전에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요 2:48) 말씀하신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시고,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는" 분이었던 것이다(요 2:24-25). 이 예수님을 잘 보고 그에게서 배웠던 베드로가 먼 훗날에 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아시는" 분으로서(요 21:17) 그는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들이 강조하는 "율법에 대한 헌신적 준수나 유대교의 개정된 제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급진적인 중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리스가 말하듯이, "그는 한 문장으로 니고데모가 대변하는 모든 것을 쓸어 내시면서 그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만들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왜냐 하면, "자신이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인의 항존적 이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거듭난다"라고 번역된 말( ' )은 문자적으로는 "다시 난다"(to be born again)고도 이해할 수 있고, "위에서 난다"(to be born from above)고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아노뗀"(' )을 공간적으로 해석한 "위에서 난다"는 말은 3:31과 19:11에서와 같이 "하늘로부터 난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다시 난다"는 번역은 이를 시간적으로 해석한 "처음부터"(from the beginning)라는 말로부터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예수님과 이를 희랍어로 옮겨 적고 있는 사도 요한은 이런 애매성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듯하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시 남이면서 동시에 위로부터 나는 남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말이다. 여기서 오늘의 주제인 중생(重生)의 성격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이 '다시 남'은 니고데모가 처음에 이해한 바와 같이 육체적인 다시 남이 아니다. 이를 육체적으로 이해한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 날 수 있삽나이까?"하고 반문했었다(4절).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영적 출생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중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또는, 린다스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기원의 문제는 도외시한 채 출생의 문제에만 집중한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말씀하시는 다시 남이 육체적인 남이 아니라, 영적인 남이라는 것을 밝혀 주기 위해서 다시 매우 강조하면서 말씀해 주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5절). 이는 니고데모가 말하는 바 "어떻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인 셈이다.

 

이런 대답을 주시고는 답답하시다는 듯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6절-7절)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어머니 태에서 난 것은 육적인 남이고,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남은 성령으로 낳는 것이라고 하셔서 니고데모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어머니 배에 다시 들어가서 두 번째로 육체적으로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두 번째의 남, 즉 중생은 참으로 성령으로 낳는 것이다. (이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어머니에게서 낳아진 사람은 그저 육일뿐이라고 생각한다든지, 성령으로 나야만 영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5절에서 "물과 성령으로" 라고 하셨던 말씀은 6절에 있는 "성령으로 난 것"이라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결국 중언법(重言法, hendiadys)적 표현으로 성령으로 남을 좀더 부연해서 설명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물은 칼빈이 잘 말하고 있듯이 "성령의 내면적으로 깨끗하게 하심과 일깨움을 의미할 뿐이다."

 

이런 주해가 옳다고 생각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물과 성령"이라는 말씀이 혹시 그 말씀을 인유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구약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빌론 포수기에서 회복시키실 때에 대해서 예언적으로 말씀하시는 에스겔 36:25-28의 말씀이다: "[그 때에]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이 예언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으로 회복됨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신이 그들 가운데 주어져서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키게 되는 것과 그들의 마음과 영의 변화, 그리고 그들 안에 있는 죄와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을 연관시키면서 설명하고 있다. 특히 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물 표상(water-imagery)을 사용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물리적인 물이 이스라엘의 윤리적 더러움과 죄 문제를 제거하거나 씻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이는 물 표상을 사용해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과정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물은 성령께서 하시는 죄를 정결케 하시는 사역의 표상으로 사용된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의미의 연관이 "물과 성령"으로 라는 헨디아디스(hendiadys) 용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이 말은 성령께서 죄를 정결케 하시는 사역을 통해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성령으로 우리의 존재가 위에서, 즉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으로 출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 전에는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칼빈도 이 본문의 가르침 중의 하나가 인류의 부패한 본성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한다. 타락한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외인들이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중생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계속적인 대립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가 이제 성령의 사역으로 영적으로 산 존재가 되는 일 -- 그것이 중생인 것이다. 칼빈이 잘 드러내고 있듯이, 이 중생이라는 말로 그는 "어느 한 부분의 변화가 아니라, 본성 전체의 갱신(the renewal of the whole nature)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여기서는 존재 전체의 변화, 인간성 전체의 변화가 의도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영혼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와 같은 지식과 은사와 이해와 지위와 능력을 가진 이라도 이런 중생을 거쳐서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고, 그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일이 없이는 그 누구라도 하나님 나라와 관련이 없다는 준엄한 선언이 여기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준비하던 사람들이라도 그 영혼이 새롭게 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이제까지 지녀 왔던 그 성향과 그 인식과 그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말이다.그런데 이 일은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혼에 사역하여 일어나는 것이기에 우리의 의식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이고,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이루어 지는 일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표현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8절).

 

이 말씀은 성령으로 나는 일 그 자체는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마치 바람 그 자체는 알 수 없고, 또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말이다. 물론 뒤에서 말할 바와 같이 바람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 즉 바람 부는 소리나 바람이 일으키는 결과들을 주의해 보면 바람이 부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다. 바람의 힘은 느낄 수 있지만 그 기원과 원인은 감추어져 있다는 말이다. 칼빈은 이런 해석이 크리소스톰과 시릴의 해석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이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좀더 분명한 의미로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중생 시키시는 일을 자연 현상인 바람과 비교하시는 말씀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칼빈은 이렇게 묻는다: "이 세상의 잠정적인 삶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그 능력에 대해 놀랄 정도로 놀랍게 역사하시는데, 천상적이고 초자연적인 삶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은밀하신 사역을 우리 자신의 정신의 이해력으로 측정해서 보지 못하는 것은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보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가?" 칼빈의 이런 해석도 흥미로운 해석이다. 그러나 이 비교를 통해서 그 기원과 원인의 신비와 그 힘과 결과의 가시성을 드러내려고 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모리스는 여기까지는 우리와 같은 주해를 한 후에 이로부터 "자연인은 성령과 접촉할 수는 있지만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의 기원도 모르고 자신의 종국적 목적도 모른다"고 보는 것이 더 선호할 만한 해석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생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이 문맥에 성격상 예수님께서 중생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닐까? 이런 이해에 가장 근접하는 입장을 잘 표현한 이는 도날드 거뜨리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 그 겉으로는 예견할 수 없음과 불가시성이란 두 성질 모두에서 바람은 성령의 활동에 대한 유용한 예증 구실을 하는 것이다. 중생의 기적은 인간의 제아무리 기묘한 능력으로도 일으킬 수 없는 것이다. 그 작용은 인간의 통제밖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에 근거해서 우리가 언제 중생했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언제 어떤 식으로 중생했는지를 알 수 없으면 중생한 것이 아니라고는 전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 중생했는지 알 수 없다는 이 말은 성령으로 새롭게 나는 일의 결과가 의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중생한 사람은 반드시 중생한 사람다운 모습과 태도를 드러내 보에게 된다. 중생 그 자체는 우리의 의식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나, 중생의 결과는 반드시 우리의 의식 가운데서 의식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중생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의 변화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2. 중생에 따르는 영혼의 기능과 정향의 변화

 

중생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영혼의 기능과 영혼의 근본적 정향(disposition)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벌코프는 "중생이란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사람 안에 심겨지는 것, 영혼의 주도적 정향이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데, 이로써 성령의 영향력 아래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으로의 생명이 낳아지게 되는 것이다"고 말한다.

 

따라서 중생한 자의 영혼은 그 영혼의 주도적 성향이 변하여 이제 중생한 자로서의 기능을 나타내 보이게 된다. 그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인지적 기능의 변화이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존재나 그의 뜻을 인정하지 아니하거나 그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지 않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神知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을 자신이 가지는 지식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기" 때문이다(고후 4:6).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아가려고 한다. "갓난아이와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벧전 2:2)는 말씀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잘 알려주는 계시의 책인 성경을 읽고 그 내용을 깊이 있게 생각하며, 성경으로부터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한 이해를 더욱 발전시켜 나간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 전체를 하나님과의 관련 가운데서 바라본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관련 없는 것은 없고,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련성을 제대로 드러낸 것이 참된 지식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모든 참된 지식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시며 알고 계시는 바에 따라서 생각하고 아는 것이 된다. 이처럼 중생한 사람은 그의 지식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의 지식을 기준으로 하여 사고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식과 중생한 사람의 바른 지식 사이에는 유비적인 관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지적 내용에서만 변화가 일어 나는 것이 아니고, 그의 감정과 정서도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하나님을 미워하거나 무관심하던 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이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분의 뜻을 알려하고 그 사랑을 표현하려고 애쓰게 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던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쓴 일이 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무한한 즐거움과 기쁨을 짐작하게 해주는 말씀이다.

또 이렇게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거룩한 사랑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 이는 인간성에 내재된 능력이나 부패한 인간성 안에 있는 사랑하는 능력을 극대화하여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 부패한 인간성 안에서의 모든 능력을 부인하는 위치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공급하시는 사랑을 가지고서 이웃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 사람과 동료 인간들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계 일반에 대해서도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서 돌보는 작업을 하게 된다. 요한은 그의 서신서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권면하면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을 안다"고 말했다(요일 4:7).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난 일과 따라서 하나님을 참으로 안다는 것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하는 지배와 다스림은 결코 이 세상을 파괴하거나 이 세상에 대해 적대적인 심정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의 정서를 가득 채우는 것은 성령이 주시는 거룩한 사랑의 심정이다. 언제나 무엇에 대해서나 그런 따뜻한 심정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따뜻한 사랑의 심정은 마음과 정서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이웃을, 피조계 일반을 사랑하기에 그 사랑에 근거해서 활동하고 움직이려는 고귀한 의지와 그렇게 움직여 나갈 수 있는 힘도 공급받는 것이다. 이렇게 중생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수동적이거나 정적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하여 나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하나님께 순종해 나가는 것이다.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요일 2:29). 중생한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이 무엇인가를 추구해 나간다. 그리고 중생한 사람은 모든 일을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행해 나간다. 자신의 부패한 능력과 의지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일을 하여 나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모든 사랑의 역사를 행하게 된다.

 

이렇게 성령에 의지해서 하나님께 순종하여 선한 일을 행해 나가는 사람은 그 행해 나가는 일이나, 그로 말마암아 이루어진 업적에 대해서 전혀 자신이 이루었다는 공로 의식을 갖지 않는 것으로 특징지어 진다. 성령에 의지해서 노력해 가는 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일을 해나가는 역동적인 사람이나, 일 자체를 위해 살아 나가는 이도 아니며, 자신이 이룬 일에 대해서 참으로 젠체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행하는 일과 관련해서도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에게는 도무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이라고는 없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하나님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자이며, 그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에 의존해서 일을 해 나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생한 사람이 성령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중생의 결과로서 나타내 보이게 되는 영혼의 기능과 정향의 변화는 전포괄적이고 전인격적인 변화이다. 그의 영혼 가운데서 중생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의 삶과 활동 전체가 중생의 영향 아래 있고, 있어야만 한다. 삶의 어떤 부분만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이 중생의 영향하에 노출되어야 한다.

 

3. 인지적 변화의 표현으로서의 외현화 된 기독교 세계관과 그 성장

 

따라서 중생자의 의식은 중생하기 전의 타락한 의식과는 아주 다른 특성을 지니게 된다.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 2:14).

 

이는, 예를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나 삼위일체에 대한 내용 등과 같은 어떤 특정한 내용만을 받아들이지 않고 미련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특정한 종교적 내용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하나님과 관련시켜서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판단한다는 말이다. 오히려 그는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대해서 파악을 해야 하고, 파악할 수 있으며, 자신이 그 파악한 내용을 구성해야 할 것처럼 생각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자율적인 존재로 여기며 사고한다. 그는 반틸이 말한 바와 같이 그 의식이 "창조적으로 구성적인(creatively constructive)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를 찾아보려고 하거나, 스스로 진리를 구성해 보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이 시공간 세계의 의미가 그 자체 안에 내재하고 있으며, 사람이 이 세상에 대한 궁극적인 해석자라고 하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를 흔히 죄의 인지적 영향(the noetic effects of sin)이라고 지칭된다.

 

이에 비해서 중생한 사람은 처음 창조 받은 아담이 그렇게 했어야만 했듯이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생각하는 수납적으로 재구성적인(receptively reconstructive) 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중생의 인지적 영향(the noetic effects of regeneration)이라는 것이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변화된 의식, 특히 그 인지적 측면이 변화한 그 내용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외현화 된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이 세상을 바라 볼 때에 이 세상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정리해 나가는 것이다.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중생은 인간의 믿음에도 앞서고 인간의 그 어떤 반응에도 앞서지만, 중생은 반드시 성경에 제시한 바를 믿고 그에 반응하도록 하는 결과를 내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한 사람의 의식이 성장할수록 그는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더욱 풍성해지면 풍성해 질수록 그의 기독교 세계관의 내용도 더 풍성해 지고, 더 바른 것이 되어 가는 것이다. 또 그가 이런 관점에서 이 세상을 더욱 바르게 관찰해 가며, 바르게 이해해 갈 때에 그는 더욱 더 온전한 기독교 세계관을 가져 나가는 것이 된다. 이런 측면은 사실 중생, 즉 영적 출생의 결과로 그에게서 시작되는 영적 성장인 성화의 한 측면이다.

 

특히 성화의 인지적 측면은 이렇게 더욱 더 온전해 지는 기독교 세계관의 정립과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영혼의 성화가 완성되는 그의 죽음에서 그는 기본적으로 온전한 기독교적 이해(그 일부가 온전한 기독교적 세계관이다!)를 가지고서 기다리다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게 되는 그의 부활과 영화 등과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루어지는 것과 함께 매우 온전한 셰계관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때까지는 우리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날마다 성숙해져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누구도 온전한 곳에 이르렀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관의 성장과 발달에 대한 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 세계관을 위한 기본적인 지침이 없는 듯이 생각하게끔 해서는 안된다. 객관적으로는 성경에 성문화된 하나님의 특별 게시와 이 특별 계시의 빛에서 해석된 일반 계시가 그 기준이고, 주관적으로는 우리의 신앙과 중생된 의식, 특히 그 인지적 측면이 그 구성 요인으로 작업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으로부터 기독교 세계관을 구성하려고 해야 하며, 이를 이룰 수 있는 이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하여 성화되어 가고 있는 이들이다.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련성 가운데서 그의 힘에 근거하여 성경과 성경의 빛에서 해석된 이 세상을 이해한 대로 제시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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