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 성경대로 하자 - 이인규권사

출처: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

이인규 권사
한국장로교총연합회 협력상담위원
네이버 카페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매니저

무엇이든지물어보세요 카페(http://cafe.naver.com/anyquestion.cafe) 회원들이 방언에 대해 자주 질문을 한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방언에 대해서 성경적인 내용을 체계적으로 요약할 필요를 느꼈다. 특히 교계에는 ‘은사중단론’에 대한 책이 등장하여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갑론을박까지 하고 있어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필자는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은사중단론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은사남용주의자도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밝히며,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정리하고자 한다. 필자가 비성경적인 내용을 강조한다고 생각되면 언제라도 성경적인 내용으로 반박하여 주기를 바란다.

(1) 모든 보수적인 정통교단이 방언의 은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일부 보수교단의 사람들 중에 은사중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장로교든 감리교든, 침례교든, 보수적인 신학을 가졌든 진보적인 신학을 가졌든, 모든 정통교단이 다 방언의 은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방언의 은사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를 포함한 보수적인 견해는 방언을 함에 있어서 성경적인 기록 그대로, 순서를 지키며, 질서있게, 적당히, 하자는 것이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7-28).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 14:22-23).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있게 하라”(고전 14:40).

(2) 방언의 은사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며, 누구나 방언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은사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각 지체마다 다른 은사를 주는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성령이 임할 때마다 항상 방언이 나타났던 것도 아니다. 원래 ‘은사’란 헬라어 ‘카리스마’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말한다. 은사란 일차적으로 두 가지의 개념을 갖는데, 하나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 즉 구원 자체를 말하며, 또 하나는 교회라는 공동체를 위하여 쓰도록 주시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영적은사를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은사가 영적은사만 말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카리스마)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롬 6:23의 ‘은사’(카리스마)는 하나님의 값없는 영생의 선물을 말한다. 은사(카리스마)의 다른 의미는 각 지체에게 주님의 몸을 세우도록 베푸신 것인데, 영적은사란 “유익을 위해 주시는 성령님의 나타남”(고전 12:7)이며, 그 목적은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고전14:5. 14:26).

방언같은 눈에 보이는 은사만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며, 은사는 각 지체에게 주는 여러가지 형태 중에 하나일 뿐이다(고전 12:4-6). 은사를 주는 성령은 한분이지만, 각 지체가 받는 은사는 여러가지가 있다. 모든 교인이 다 동일한 은사를 받는다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며, 여러 가지의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4-12).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전 12:28-30).

어떤 사람은 방언의 은사가 은사의 관문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는 많은 은사가 있으며, 어느 특정한 은사의 순서를 말하지 않는다. 각 지체마다 주시는 은사가 다르다고 성경은 언급한다.

(3) 외국어로 말하는 것만이 방언이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방언의 은사란 헬라어 ‘랄레인 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이며 그 의미는 ‘다른 방언으로(다른 언어로) 말하기’이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여 처음 나타난 방언의 은사는 실제 사용되는 다른 지역의 언어를 말하는 형태였음이 분명하다(행 2:4-11).

그러나 바울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고전 13:1)이라고 하였고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말로 알아듣는 자가 없다”(고전 14:2)라고 하였으므로 오직 외국어만 방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른 지역의 방언은 알아 들을 수가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에, 방언은 두 가지의 형태로 추측되어진다.

그러나 단순하게 한가지 음이나 몇가지 동일한 반복구절만을 발음하는 방언이 정말 방언이냐고 묻는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누구보다도 본인이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며, 모든 방언을 다 방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점에 동의하여야만 한다. 그러한 동일한 음을 반복하는 방언은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로 실험도 가능하다. 성경은 자기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의 기도는 ‘야만’이라고 말하며(고전 14:12) 모두가 다 방언의 은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졌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9-31).

또 방언은 오순절 이후 사도행전에서 성령세례를 받고 믿음을 가진 표적으로 기록되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성경에서 성령세례를 받고 믿음을 가진 경우에는 반드시 방언이 나타난 것은 아니다.

(4) 연습에 의한 방언은 잘못된 것이다
은사란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즉 어떤 연습이나 훈련에 의하여 얻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연습과 훈련에 의하여 얻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나 행위로 취득하는 것이 되어 버리므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할렐루야’를 하루에 천번씩 연습하면 혀가 풀려서 방언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주장도 있고, 방언을 하는 그룹과 방언을 못하는 그룹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함께 연습을 하면 방언을 하게 된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러한 방언은 성경적인 방언이 아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믿음이 전혀 없는 비기독교인도 이러한 연습에 의한 방언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습에 의하여 방언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면, 자기 방언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지 확인을 하여 볼 필요가 있다.
                  
(5) 고린도전서 12-14장은 고린도교회의 은사의 남용에 대한 바울의 비판과 충고를 기록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2-14장은 그다지 어려운 구절이 아니며, 난해한 구절도 없다. 어느 누가 읽어도, 어느 성경주석을 참고한다고 할지라도, 그 구절의 내용은 고린도교회에서 행하여지던 방언의 은사에 대한 남용을 바울이 자제하도록 권면하는 내용이 분명하다.

즉 성경대로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려면 오늘날 교회에서 행하여지는 방언의 형태는 상당히 자제를 하여야만 한다.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고린도전서 12-14장을 마음 문을 모두 열고 제 3자의 입장에서 정독하여 보시면 바울의 뜻을 분명히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방언은 믿는 자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를 위한 것이다. 또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 못하므로 덕 세움을 받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고전 14:22).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고전 14:14-17).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6-12).

고린도전서는 그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행하던 무질서한 방언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자제하도록 권면하고 충고하는 내용이다. 바울은 서신을 통하여 방언에 대해서 많은 충고를 하고 있다. 오늘날도 방언이 남용되는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내용이 아니라고 비판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을 남용해도 괜찮다든지, 성경과 달리 해석을 하여야 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기독교인의 행위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진리를 자기의 기준에 맞춘다. 내가 방언을 남용하고 있으면, 그것이 비성경적이라고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또 내가 하는 행동은 그것이 비성경적인 내용이 분명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기도를 하지 않으면 기도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있다면 주일학교 교사는 젊은 영혼을 양육시키는 매우 중요한 직분이라고 주장하며, 내가 성가대를 하고 있지 않으면 성가대가 교회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즉 내가 직접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가치척도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승용차가 없을 때에는 교통신호를 안 지키는 승용차를 욕하지만, 승용차를 갖게 되면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들을 욕하게 되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 이렇듯 이단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교회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며, 정통교회가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게 된다. ‘나’라는 기준이 가치척도의 선입감으로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사전을 인용하여 보자. 이것을 인용하는 이유는 방언의 남용에 대한 고린도전서 12-14장의 객관적인 성경해석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함이다.

“고린도교회에서는 방언에 대해서 너무 지나치게 높은 가치를 두었으며, 방언의 은사가 성령의 임하심에 대한 특별한 증거라고 생각하였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도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서 방언으로 기도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밖의 불신자들에게 쓸데없이 비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교회 성도들이나 불신자들에게 덕이 되고 모본이 될 수 있도록 방언을 사용하라고 권면하였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방언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여겼으며, 모든 고린도교인들이 다 방언으로 말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는 헌신적인 생활이 더욱 귀중하며 방언을 할 때에는 반드시 통역과 함께 해야 된다고 가르쳤다. 여기에서 통역은 아마도 단순한 번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꿈이나 표적이나 예언적인 행위들을 해석하듯이 방언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또한 바울은 방언을 말할 때에 세 사람이 넘지 않는 범위에서 순서를 정해놓고 차례대로 하라고 가르쳤다. 방언은 성령의 부분적인 은사들 가운데 한가지이기 때문에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은사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하였다.”

물론 기록된 성경의 내용은 시대적이고 전통적인 상황까지 불문하고 반드시 문자적으로 똑같이 지켜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필자 역시 유대인들의 전통과 문화적인 제도까지 그대로 지키자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서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기록된 것을 “도둑질 하여도 좋다”고 해석을 하면 안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시대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변화가 있을지라도, 도둑질을 하여도 좋다든지, 간음을 하여도 상관이 없다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바울이 비판하는 고린도교회에서 행해지던 방언에 대해서 성경적인 정리를 하여 보자. 필자가 말하려는 내용은 성경대로 하자는 것이다.

참고로 감리교의 교리와 장정을 보면 방언에 대한 교리가 나와 있다.

“(29) 제 15조 회중에서 해득(解得)할 방언을 쓸 것 :
예배당에서 공중(公衆) 기도를 할 때에나 혹 성례를 행할 때에 교우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초대교회의 규례를 분명히 위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필자는 은사중단론자가 아니며, 성경대로 하는 방언을 정리하여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일단 감리교회는 공중 기도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쓸 수 없다는 것이 교리로 정하여져 있으므로 그것을 위반하는 것은 교리를 위반하는 것이다.

일단 본인이 감리교회이므로 먼저 감리교회의 교리와 장정을 살펴보았다. 일단 감리교회는 그 교리로 볼 때에 공중기도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흥회의 강사가 공중 기도를 방언으로 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인도자가 방언의 기도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교리적으로 잘못되었다.

물론 방언을 할 수 있다고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방언을 못한다고 구원을 잃는 것도 아니다. 가짜 방언을 하였다고 지옥가는 것도 아니고, 진짜 방언을 유창하게 하였다고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니다. 요즈음 같이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는 시대에, 성경적인 방언과 사도 바울이 비판했던 방언에 대해서 알아보자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방언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권면하는가? 고린도전서 12-14장의 성경을 두 세번만 정독하여 읽어보면 누구든지 정리가 가능할 것이다.

방언의 은사에 대해서 가장 좋은 것은 성경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1) 덕을 세우는 방언을 하라(14:3-5).
(2) 너희가 다 방언을 하기를 원하지만,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한다(14:5).
(3) 통역이 없이 방언을 말하면 유익하지 않다(14:6).
(4)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다(14:7-9).
(5)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야만이 된다(14:11).
(6) 방언의 기도는 마음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기도가 된다(14:14).
(7) 일만마디 방언보다 다섯마디 가르치는 것이 낫다(14:19).
(8) 방언은 믿지 않는자들의 표적이다(14:22).
(9) 온 교회가 방언을 하면 믿지 않는자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미쳤다고 할 수 있다(14:23).
(10) 두사람이나 세사람이 순서를 지켜서 하라(14:27).

(11) 순서를 지켜서 하되, 한사람은 통역을 할 것이며, 통역을 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 잠잠하며, 자기와 하나님께만 하라(14:28).
(12)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는 말라, 그러나 적당하고 질서대로 하여야 한다(14:40).
(13) 사랑이 없는 방언은 꽹가리일 뿐이다(13:1).
(14) 부분적이며 폐하여질 것이다(13:8-10).
(15) 장성한 사람에게는 어린아이의 시절의 것이 된다(13:11).
(16)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12:31).
(17) 교회의 각 지체들에게 주는 수많은 은사 중에서 하나의 은사이다(12:4-11).
(18) 모두 다 방언을 말하지 않는다(12:30).



※ 장로교 헌법

장로교 헌법중 교리표준으로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서를 체택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1장 3항에 ".... 만약 소리를 내어서 기도할 때는 알려진 언어로 해야 한다."로 규정해 놓고 있다. 즉 소리를 내어 기도할 때는 일반 언어로 해야 한다. 여기서 소리를 내어 기도한다는 의미는 공적인 기도나 여러 사람들 앞에서의 기도 뿐만 아니라 입 밖으로 표현되는 기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해설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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