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에 대한 로버트 가프리1) 박사 견해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에 대한 로버트 가프리1) 박사 견해 

 

 

가장 큰 이슈는 음악이 우리의 영혼을 움직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며 우리의 지성은 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2003년 그린빌 신학교의 예배관련 컨퍼런스에서 로버트 가프리박사는 CCM에 관한 강연을 하였다. 그는 오늘날 "가장 논란이 적은 주제"에 대해 강연하게 된 것에 대해 소감을 밝혔다. 종교개혁이후 장로교 예배방식은 최근 30년 동안 가장 놀라운 속도로 커다란 변화를 했다. 분명 이 변화의 가장 큰 원인과 주안점은 교회음악에 있다고 말했다. 소위 '컨템포러리 크리스챤 뮤직(CCM)'이라고 불리우는 음악의 발전은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확산되었다. 보수주의나 자유주의에 할 것 없이 개혁주의와 오순절파의 모든 교파에 걸쳐 이 음악은 두루 퍼져있다. 심지어는 정교회와 영국의 프리처치에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가프리박사는 그의 부인이 개혁주의 기독교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이제 채플시간에 CCM만을 들을 수 있으며, 만일 자신의 부인이 이의를 제기하면 곧바로 청년들에 대한 감이 떨어지는 사람이고, 복음주의의 필요성에 대해 둔감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다고 한다.

 

비록 CCM이 시편찬송이나 찬송가를 전멸시키지는 못했지만, 소위 말하는 '열린 예배(Blended worship)'라 불리우는 이것 조금, 저것 조금 섞어 놓은 예배형식으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결국 가프리 박사에 의하면 '아무것도 아닌' 예배를 받아들이고 있다.

 

가프리 박사는 청중들 가운데 혹시 화낼 사람이 있을 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CCM을 이렇게 정의한다고 한다. "네가지 키(피아노), 세가지 코드, 2시간." CCM의 강력한 수많은 지지자들뿐 아니라 그 설득력 있는 이러한 특징은 우리로 하여금 CCM에 대해서 한번쯤 자세히 생각해보고 조사해 볼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CCM에 대한 조롱을 통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워도, 남들에게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기에는 부적절합니다." 로버트 가프리는 이렇게 농담을 했다.

 

우리는 먼저 테이블에 놓여진 문제들 가운데 늘 우리를 괴롭히지만 문제의 핵심이 아닌 부분들은 제쳐놓아야 합니다. CCM이 단지 최신 음악이기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옛날 음악이라고 해서 근본적으로 우수한 점은 없습니다. 또한 새로운 음악이라고 해서 더 열등한 것도 아니지요. 우리는 또 CCM이 익숙지 않다고 해서 반대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중 대다수는 음악가가 아니니까요. 우리가 대부분 좋아하는 음악은 사실 우리에게 익숙하기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낯설다고 해서 이런류의 음악을 반대하는 것도 적절한 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즐겨 따라 부르는 음악들 중 상당수도 아마 나쁜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비록 음악적으로 반박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 가사들 중 어떤 것들이 이단적이어서 나쁜것이다 라고도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단적 가사는 오히려 역사적으로 어떤 찬송집 가운데 더 이단적인 요소가 많았습니다. 오직 이단적이지 않은 정말 안심하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시편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찬송가를 부를 것인가 아니면 어떤 다른 것을 부를 것인가가 아닙니다.

 

어디에서 이러한 음악이 탄생되었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이슈가 될 수 있는가? 먼저 다룰 중요한 이슈는 어디에서 이런류의 음악이 나왔는가 하는 점이다. 이 음악의 원천으로부터 우리가 이끌어 낼 수 있는 결론은 그것이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신학적으로나 그 음악에 영감을 준 경건성에 대해서는 확신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결코 음악은 중립적이지 않다. 가사와 멜로디 모두 저자의 어떤 의도를 품고 있으며, 어떤 경건의 진리를 가지고 있는지 또 어떻게 그것을 활용하는 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운동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 전통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금 과거를 돌이켜보면, CCM이 부흥사들의 찬송(revivalist hymnody)이 발전된 새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흥가들의 찬송이란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유행하던 음악이었는데, 보다 발랄하고, 열광적이며 동시대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종종 신학적으로는 빈약한 수준의 가사를 가진 찬송가이다. 19세기의 부흥주의 찬송 중 "그가 나를 이끄시네"는 특별히 반복이 심한 찬송인데, 이는 CCM이 가진 가장 큰 단점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찬송과 CCM을 비교하면, 일종의 경건성과 센티멘탈리즘과 개인적 묵상의 느낌 등이 담겨 있는데 CCM과 매우 흡사하다.

 

만일 CCM의 발전과정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오순절주의의 급신장과 함께 했다고 볼 수 있다. CCM의 가장 가까운 선조가 있다면 20세기의 오순절주의 운동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이 운동의 종교적 힘과 체험과 흥분 가운데, 그 추종자들은 음악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으며, 부흥사들의 찬송가 전통을 이어받아 더 감동적이고 더 흥미있는 음악을 만들어 냈다. 애미 셈플 맥퍼슨이란 사람은 한 예로서 포스퀘어 가스펠 교회의 오순절 설립자이며 극장형 텐트 부흥주의자였다. 이 사람은 음악과 예배에 대한 개념에 있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여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 개념이 오늘날 오순절주의를 넘어 온 세계로 퍼지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20년 이 여인은 교회에서 자신만의 밴드를 구성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젊은 안쏘니 퀸도 있었다. 그녀는 합창곡들을 작곡하여 불렀는데, 여론의 지탄을 받게 되자 다음과 같은 가사를 가진 합창곡을 썼다. "당신은 당신 좋을 데로 날 평가하지만..."

그녀는 드라마에서도 선구자적 역할을 하여 무대에서 설교를 연출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교회 역사가로 역사를 연구하게 만드는 일들이다. 과연 오늘날 장로교는 어떤 모습인가 생각해 보게 한다.

 

1920년대 오순절 운동의 신학과 신앙의 한 분출로써 이러한 음악의 원조가 된 것 이외에 갖게 되는 생각은, 과연 오순절 교회에 유익한 음악이 비 오순절 교회에도 유익한가하는 점이다. 다른 종류의 신학과 신앙적 삶의 배경에서 태어난 경건성을 다른 그룹에도 그대로 전수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아마도 당신은 그렇게 생각지 않을 줄 안다." 가프리 박사가 말했다. "하지만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 중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가프리 박사는 또한 19세기 우리 문화의 낭만주의 영향을 꼽았다. - 이성주의로부터 벗어나 경험과 신비적인 초월을 중시하는 운동을 말한다. 낭만주의란 믿기로 상당한 음악적 발전이 있었던 시기였다.

 

그 기원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떠나서 로버트 가프리 박사는 이 음악의 성격에 대해 고찰하였다. CCM에서 발견하게 되는 문제점들은 상당히 많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공통점이 발견되는데, 그 중 하나는 그 자신이 보다 지적으로 성숙된 음악임을 과시하고자 한다. 가프리 박사는 믿기로 이를 통해서 이 음악이 누구나 들으면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 직청직해성을 갖게 된 것인데, 이 음악을 듣기 위해 연구할 필요도 없고, 반추해볼 필요도 없으며, 어떤 노력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가프리는 CCM의 이러한 직해성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근거가 없다라고 말한다. "얼마나 쉬워져야 하는겁니까?" "교회 안의 두살박이 어린아이도 알아들을 정도가 되어야 하나요?" 만일 길거리의 한 행인, 기독교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인 사람이 갑자기 교회에 들어와서 찬송을 들을 때 그 내용을 완전히 이해해야 하는 수준이 되야하나요?" 이러한 모호한 주장들을 늘어 놓기 전에 우리는 성경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야할 필요가 있다. 그는 주장한다. "성경은 얼마나 쉽습니까?" 성경에는 어려운 개념과 단어들이 있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는 쉽게 이해됨의 정도가 정말 중요한 것인가를 물음으로써 이 부분을 마무리하면서, 실제로 CCM이 추구하는 것은 즉각적인 반응과 체험이다라고 말한다.

 

CCM은 또한 자신이 단순하다는 것을 자랑한다. 하지만 가프리 박사가 취한 의문은 단순하다기 보다는 얄팍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들은 CCM 곡중 대다수가 "순간적으로 떠오른"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고 지적한다. 누군가는 정말 이 곡들의 작가가 이런 종류의 기독교 감수성을 표현하기 위해 5분 이상을 소요했을까 의아하게 생각한다. 거기엔 고심한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

 

CCM은 종종 자신의 단순성 때문에 기억하기 쉽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단순하기 보다는 반복이 심하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가프리 박사는 "싱 알렐루야(Sing Alleluia)'를 예로 들면서 이 곡을 부를 때 찬양 리더들은 사람들의 두 손을 올리게 하고 눈을 감고 열한번 이것을 반복하게 한다고 한다. 그러면 심오한 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알렐루야는 정말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찬양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종종 CCM은 자신의 음악이야말로 진솔한 감정을 표현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감정적으로 매우 얄팍하고 종종 센티멘탈에 지나지 않음을 나타낸다. 가프리 박사는 말한다. "당신들은 어쩐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예수님에 대한 러브송을 부르지 않습니다." 이 "러브송"이란 단어는 특별히 로맨틱한 관계를 표현하는 데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는 무언가 다른 카테고리와 뒤섞여진 느낌으로 마음이 편치가 않으며, 근본적으로 감정을 분산시키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예수님을 "내 가장 친한 친구"로 표현하는 곡들도 대부분 육신을 서로 들썩거리게만 만들뿐이다. 이것은 성경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난 것들로서 그 성격상 문제가 있는 단어와 표현들을 채용해 사용한 것들이다.

 

CCM의 목적

 

과연 CCM의 목적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교회의 삶을 활기차게하고, 전도에 성공하게 만들고, 외부로 손을 뻗치는 것이다라고 상상할 것이다. 가프리 박사는 CCM이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잠시 머물 "중간지대"로서뿐 아니라 교회를 나가게 하는 원인이라고 말한다. 가프리 박사에 의하면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교회성장운동의 대가인 조지 바나(George Barna)에 의하면 최근 통계조사결과 미국교회들이 20 혹은 40년동안 교회 성장을 강력히 추구해 온 결과 오히려 교인수가 더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괄시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이러한 메시지를 암시적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예배는 별로 중요한 게 아냐" 많은 교회들이 최신의 접근방법을 찾아 시행하여 저녁 예배도 없애버렸지만 오히려 그 성도수는 줄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물론 이 예기는 교회성장잡지에 씌어진 내용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캘리포니아 교회 가운데에서 경험한 일을 이렇게 말한다. "많은 교회들이 교회 성장방법을 쫓아갔지만 실패하고 말았으며 오히려 엄청난 영적인 손실과 재정적 손해를 초래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들은 거의 소개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 개혁주의 교회 설립단체에서 십년전에 프로젝트를 통해 조사한 결과 이렇게 교회성장원리를 추구한 교회들과 전통적 방식을 추구한 교회들을 비교해 보았을 때 전통적 방식을 추구한 교회들이 더 성장했고 더 성공적이었다는 것이다. 가프리박사는 농담하기를 "화란사람들은 리듬을 싫어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바나의 통계수치가 보여주는 것은 정말로 미국에서 교회는 성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목적은 고상합니다. 교회를 성장시키고 생기있게 만드는 것이지만 그 이면에 깔려있는 개념에는 매우 위험한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풀러 신학교의 찰스 크래프트는 크리스챤 투데이이라는 잡지에서 CCM을 이렇게 두둔하고 나섰다. "진정한 예배라는 것은 보통 찬양과 예배분위기 조성을 위해 많은 노래가 필요합니다." 가프리 박사는 말하기를 이러한 개념, 즉 어떤 예배 분위기를 조성해야만 된다는 생각과 그것 없이는 예배가 안된다는 것을 문제삼았다. 크래프트 교수는 "이러한 예배는 눈을 감고 새로운 곡을 15분 20분가량 불러서 예배분위기 조성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가프리 박사는 크래프트 교수의 관점에서 전통적 예배가 너무나 정보만 가득하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변론했다. 기존의 전통적 에배는 "정보"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물론 낮은 수준의 설교와 예배도 존재한다. "내가 어렸을 때 아직 스스로 절제가 안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가프리 박사는 농담을 합니다. "나는 종종 개혁주의적 설교 가운데에서 발견하게 되는 유일한 놀라움은 "오우! 이 히브리단어가 그런 뜻이었어!"인줄 알았다."

 

크래프트 교수는 그의 글에서 더 불평을 한다. "우리는 너무 이성적 내용과 정보만이 가득한 찬송가를 부르기에 기억에 남지도 않는다. 이제 이런 이성주의적이고 지성 중심적인 현재의 복음주의적 교회의 타성을 중지시켜야 한다." 가프리 박사는 말하기를 풀러신학교의 교수가 위에서 촉구한 마인드는 종교적 관점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기독교적 관점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힌두교같은 것으로 결국 CCM이 가진 운동의 큰 위험성을 대변해주고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원래 CCM이 옹호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었고 염두에 둔 것도 아닌데, 실제로는 그 내면적 동기에 깔린 현실로써 결국 음악을 새로운 의식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가프리는 인정하기를 로버트 답니가 19세기 음악 트렌드가 위험하다며 한 말, 즉 "지옥에 수백만의 영혼들이 있는 것은 진정한 종교적 열정과 동물적 감정의 고조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감정이란 것은 쉽게 조종당하는 것입니다. 가프리 박사는 말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심오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것이 종교적인 언어 가운데 일어나면 그들은 말하기를 나는 심오한 종교적 체험을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실상 감정이 위조되었을 뿐이다.

 

찰스 피니는 19세기 저명한 부흥가였는데 말하기를 "영혼들의 우세한 윤리적 파워를 일으키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흥분시키는 것이다." 칼빈이 말했듯이, 물론 우리는 거듭난 은혜가 없이는 어떠한 윤리적인 힘도 있을 수 없으며, 죽어 있는 것이다. 가프리 박사는 응답한다. 모든 피니이후의 부흥가들의 전통은 피니의 방식을 따라왔다. 에미 셈플 맥퍼슨도 흥분된 분위기를 컨트롤하여 청중들을 사로잡는데 큰 중점을 잡았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신학과 경건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가프리 박사는 콕 찍어 말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방식이 아니다.

 

시편 (Book of Psalms - psalm의 뜻은 그리스어로 하프에 맞춰진 찬양이란 뜻(역자주)

 

이러한 운동에서 나온 일들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보자. 성경은 언제나 진리의 표준인 것이다. 특별히 성경을 이용하여 음악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이 찬양에 대한 완전한 책(시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설교와 기도를 성경에 의해 평가하지만 성경에는 설교와 기도의 책들은 없다-여기서 책이란 성경의 66권책을 말한다(역자주). 하지만 우리에게는 노래에 대한 책을 주셨다. 가프리는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는지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능한 자신의 추측으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음악을 만나면 광란에 치닫는 경향이 있음을 알고 음악에 의해 일깨워지는 감정의 중요함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가프리 박사는 개혁주의 사람들은 모두 시편찬송이야말로 찬양의 기준이고 잣대라는데 동의한다고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150편의 찬양을 주셨다면, 그들은 진정 어떤 노래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말해주는 지표가 됨에 틀림없다고 본다.

 

CCM의 기원과 달리, 시편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으며 우리가 예배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께 말해야하는지에 대한 모델과 기술들을 해 주고 있다. 시편의 성격은 우리의 찬양 가운데 있어야할 중요 요소들의 영적 균형을 제시해 주고 있다. 시편 146편을 보면, 가프리 박사는 예배자의 하나님께 대한 주관적인 언급과 객관적인 언급의 균형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찬송가는 신학을 가르쳐야한다는 논쟁과 관련해서 가프리박사는 말하기를 시편의 기능은 단순히 신학을 가르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시편에서 발견되는 또다른 균형은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균형이다. 내 예배의 얼마만큼이 하나님께 대한 나의 개인적 응답이어야 하며 또 얼마만큼이 공동체의 일부로서 나의 응답이어야 하는가?

 

시편에서 가르치는 또 하나의 흥미있는 균형은 가르침 받은 것과 가르침받지 않은 것에 대한 균형이다. 오직 시편찬송만 불러야 한다는 것과 관련하여 그것은 신약의 완전성을 가르치는 데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 예를 들면 시편에는 예수님에 대한 이름이 없다. 가프리 박사는 이 기준에 의하여 반박하건데, 시편찬송은 구약에도 역시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시편은 그 성격상 주도적으로 교훈적이진 않다. 시편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신약과 구약의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드리는데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시편의 새 노래는 구속의 노래를 말한다. 즉 옛날의 노래는 창조의 노래였다. 그분의 모든 것을 찬양해야 한다. 하지만 새로운 노래는 이미 시편 가운데 있다.

 

시편에는 가르쳐 지지 않은 것에 대한 이슈들도 있지만 또한 찬송가에서 간과되고 있는 것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창조를 예로 들면 시편은 찬송가에 비하여 이 주제를 매우 크게 다루고 있으며, 이것은 위대한 주제이다. 시편은 또한 악인에 대한 주제를 두드러지게 언급하고 있다. 두편을 제외한 모든 노래에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악인에 대한 언급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편찬송은 의인과 악인의 대립적인 주제로 가득하며,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있는 자들과 그것을 배척하는 자들의 대립을 노래한다. 당신이 하나님편인가 아니면 그 적인가는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지속적으로 상기해야할 부분이다. 시편은 또한 하나님의 언약과 그의 백성에 대한 신실하심에 대해 충분히 말하는데 이것은 찬송가에서 상대적으로 적게 다루는 부분이다.

 

시편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특별히 다루고 있는데, 핍박받고 굶주린 자들을 언급하며 옥에 갇힌 자들을 자유롭게 하고 눈먼자를 보게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찬송가에서 외면적으로는 다루지 않고 있는 주제들이다. "겸손한 자를 일으키시며, 의로운 자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이점에서 하이퍼 칼비니즘(hyper-Calvinism)을 따르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큰 차이를 만들었다. 우리가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평가할 때 거기에는 차이가 발생한다. 우리가 이러한 특징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것을 위해 오신 구세주에 주의하게 되어 있다. 시편에서 발견하게 되는 깊이와 균형은 현대의 예배에서 불려지는 찬양뿐 아니라 전통적인 찬송가도 비할 바가 못되는 것이다.

 

시편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한가지 충격적인 부분은 그것이 결코 쉽게 이해되지 못한다는 것과 그것은 상당히 낯설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편이 상당히 공들여 작시되었다는 것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처럼 공들여 다듬어진 시편의 성격은 "순간적인 필링에 의해 씌여진" CCM의 대부분 노래들과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작사가들에게 영감을 주셔서 시편을 정성스럽게 다듬으라고 하셨다면, 어떻게 우리가 기타줄을 튕기면서 익숙한 감정들을 적어놓고 예배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시편에서 또한 인간이 가진 감정의 풍성한 범위들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즐거운 시대를 살고 있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은 행복해야만 한다. 그리고 교회의 기능이란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합당한 감정이란 기쁨밖에 없다. 기쁨이란 중요한 감정이며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적당한 반응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험하는 유일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슬픔과 좌절과 분노와 깊은 애통과 죄와 세상의 환경들로 인한 고난 및 기타 여러 진정한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는 말씀을 주셨다.

 

가프리 박사는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한 요양소의 나이든 여인을 방문한 자신의 친구 목사의 얘기를 하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그녀는 자신의 목사님에게 시편 88편을 읽어달라고 요청했다. "시편중 가장 처량한 노래이지요" 가프리 박사는 말한다. 그것은 외롭고 고통받는 마음에 대한 애가인데, 이 시편을 이 나이든 요양소의 여인에게 주신것은 그녀의 경험과 고통이 특별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있는 것들임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목사님은 그 여인에게 시편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읽어줌으로써 여인이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가프리 교수는 주장한다.

 

계속해서 이어가기를 시편은 우리에게 어떤 음계를 가르쳐 주지는 않습니다. 어떤 곡조를 선택하는 기준에 대해 말하면서, 곡조는 그 본문을 지지할 수 있어야 하고 노래할 수 있어야 하며, 본문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해야 합니다. 덧붙여서 곡조에 대한 악기의 배치는 노래를 압도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점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드럼이나 위압적인 오르간 소리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음악이 우리의 영혼을 움직이고 우리의 정신이 암시를 받는 가장 유효한 방법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과 정신을 움직이는 것과 관련하여 가프리 박사는 한 나이든 교인의 장례식을 얘기하면서, 그 곳에서 그의 손녀들은 자신의 할머님이 어떻게 시편을 모두 암기하셨으며 그것을 어릴 때부터 불러왔는지 상기했던 내용을 말해주었습니다. 그의 손녀들은 종종 할머니에게 시편의 구절을 물으며 몇 장인지 맞춰보라고 했으며 때때로 헛갈리도록 구절들을 섞어서 질문했지만 할머니는 이 때문에 당황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가프리 박사는 묻습니다. " 이 여인은 평생토록 시편을 부르며 살았습니다. 마음 속 깊이 시편을 담아 두었습니다. 이것은 축복아닌가요? 만일 그녀가 '알렐루야'만을 열한번 계속해서 부르는 식의 찬양만 계속했다면 더 좋았을까요? 그에 비할바가 못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우는 가장 좋은 방법-그것을 노래하는 것-중 하나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가난하게 만들었습니다. 

개혁신앙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시편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부르지 못하게 하고 배우지 못하게 하는 것은 가장 큰 영적 재난입니다. 우리의 가장 좋은 전략은 CCM을 비난하기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말고 그 시간에 시편을 찬송하고 배워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가프리 박사는 끝으로 말합니다. "이상한 점은, 그런 것에 무엇인가 전염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1) 로버트 가프리(W. Robert Godfrey(Ph.D.)는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Westi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1981년 이후 교회사 교수로 가르쳤고, 제3대 학장이었으며, 미국연합 개혁교회(United Rdformed Churches)소속 목사이다. 국내 저서: 오직 성경으로, 칼빈(순례자와 목회자),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패턴, 종교개혁과 개혁신앙]

 

포도나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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