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의 정의

신학의 정의

 

 

신학(神學)은 흔히 그 문자적인 의미에 따라서,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라고 설명된다. 신학은 神과 學이라는 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학문에서뿐만 아니라, 영어(Theology)나 독일어(Theologie)나 희랍어(θεολογια )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 신학은 분명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떠한 일을 하시는지 등에 관한 모든 것들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신학을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라고만 한다면, 너무 제한적인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신학은 하나님 이외에도 사람이나 우주, 또는 내세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은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에 관한 체계적인 학문”으로 정의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신학의 필요성

 

신학이 없어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다음 몇 가지 이유에서 볼 때, 신학은 반드시 필요한 학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신학은 사람의 본성을 만족케 한다.

사람은 자신이 없거나 확실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주저한다. 그러나 자기가 확실하다고 여기는 사실이나 신념에 대해서는 누가 요구를 하지 않아도 밖으로 표현을 하고 싶어한다. 신념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욕구도 더욱 강해진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자기의 신념이 정당한 것임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고 싶어하기도 한다. 이것은 누구에게서나 볼 수 있는 인간 공통의 본성이다. 이러한 본성의 욕구를 체계적으로 만든 것이 바로 신학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다 신학을 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비록 구체적으로 체계를 갖춘 학문은 아닐지 모르나. 자기의 본성적 욕구는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사람에게 있어서 신학은 꼭 필요한 학문이다.   

 

둘째, 신학은 믿음의 내용을 분명하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마 16:15). 이 질문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신자는 주님의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도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을 했다. 이 대답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스도가 무엇을 뜻하는지. 왜 예수님께서 주님과 그리시도가 되시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지를 알 때에 라야 가능하다. 이런 내용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신학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모든 신자들에게 필수적이다.   

 

셋째, 신학은 성도를 하나가 되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피부색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형제와 자매로 여긴다. 또 국적에 관계없이 모두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긴다. 그리고 한 믿음과 한 하나님 안에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기 위하여 노력을 한다(엡 4:3-6).  그러나 여기에는 일정한 전제가 있다.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 즉 신학이 같은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신자들 사이의 결속과 한 하나님 나라의 유지를 가능하게 해주는 끈이요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꼭 필요하다.   

 

넷째, 신학은 이단을 분별케 한다.

신학이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식별해내는 기준이 되기도 함을 의미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무조건 덮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공의를 포함한다. 성도는 비 진리를 분별해내야 한다. 그래서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 만일 비 진리를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방인처럼 여겨야 한다. 신학은 어디까지를 한 형제로 포용할 수 있으며, 어디서부터는 이방인으로 여겨야 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 기준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복음의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학문이다.   

 

다섯째, 신학은 전도의 내용을 제시해준다.

예수님께서는 승천을 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명령하시기를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행 1:8). 전도는 성도들이 지켜야 할 지상명령(至上命令)이다. 그러면 성도는 무엇을 전해야 하는가. 옛날 어떤 목사님은 "예수 천당" 단 한 마디를 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외침 속에는 신학이 담겨져 있다. 예수는 누구인가, 천당은 무엇인가, 왜 예수가 천당인가 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전제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이 전제는 신학 전반의 주제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의 전도 형식이나 분량은 서로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똑같다. 따라서 신학은 전도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다.   

 

여섯째, 신학은 교육의 자료가 된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전도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교육을 하는 것이다. 전도의 명령은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으로 이어져 있다(마 28:20). 성도는 새로 믿는 자들이나 어린아이들에게 구원의 도리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또한 이미 믿는 자들에게도 성경을 계속적으로 가르쳐서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더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간교한 탈을 쓴 이단이나 사설의 미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분별력을 가지게 해야 한다. 이 때 교육의 내용이 되는 것이 바로 신학이다. 그렇다고 신학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학문을 가르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교육의 목적이나 방법, 내용은 신학적 바탕에서 나와진다. 그렇지 않은 교육은 매우 단편적이어서 편협 되거나, 일관성이 없어지기가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세 이후로 일부에서는 신학을 멀리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 경향을 보다 노골화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거나, 신학의 차이 때문에 분쟁과 분열이 생겨난다거나, 신자는 항상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나 감동을 따라야 한다는 등이 그 이유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신학 없는 신앙생활은 너무나도 위험천만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부지런히 신학을 연구하고, 발전시키고,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신학과 관련해서 유념할 것이 있다. 지기의 신학만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독선적인 자세이다. 신학은 사람에 의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부족할 수가 있다. 편협 될 수도 있다. 때로는 잘못을 범할 수도 있다. 유한한 사람에게는 항상 오류의 가능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신학을 절대시 한 나머지, 그것으로 함부로 남을 평가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무조건 권위를 따르려 하거나, 전통을 고집하려는 자세를 가져서도 안 된다. 우리는 항상 어떤 것이 바른 신학인지를 조심스럽게 반성하고 살피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신학을 하는 방법인가.   

 

신학의 방법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시도해온 신학의 방법들을 살펴보면, 다음 몇 가지 방식들이 있다.   

 

첫째, 이성적인 방법이다.

사람은 이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그 이성으로 많은 것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그리고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추리도 한다. 때로는 하나님이나 피조물들에 대해서도 이성적 추론의 대상을 삼는다. 그리고 그 결과를 토대로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거나, 구원은 이렇게 얻어지는 것이라는 식의 결론에 도달한다. 고대 희랍이나 로마에서는 이 방법이 많이 사용되었다. 현대에도 이 방법을 최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주어져 있다(롬 1:19). 그러나 사람의 이성으로 추론해낸 신학은 진정한 신학이기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를 다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혹 알아낸다 해도 그것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이성은 죄로 말미암아서 정상적인 기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이성적 추론의 결과가 철학이 될 수는 있어도, 진정한 신학은 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어 계신다. 그래서 우리들의 생각과 하나님이 생각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깊은 것을 온전히 통달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성령뿐이시다(고전 2:10). 하물며 범죄한 사람의 이성이라면 오죽이나 하겠는가.   

 

둘째, 경험적인 방법이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영이시다. 그래서 영적인 존재인 사람들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기 원하신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친히 사람들을 찾아 오셔서, 사람들을 만나 주신다. 따라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체험할 수가 있어진다.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한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체험한다. 경험적인 방법이란 이러한 체험들을 근거로 신학을 체계화하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성으로 설명하거나 납득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하나님을 생생한 체험을 통해서 확신하게 되는 신자들이 많이 있다. 체험은 신자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체험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다. 부분적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의 체험이 동일할 수는 없다. 그래서 경험에 기초한 신학을 마치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코끼리의 한 부분만을 만지고 코끼리를 기둥 같다느니, 고무 호스 같다느니 하는 것처럼 되기가 쉽다. 그리고 체험만을 따르려 하다가는 신비주의에 흐르기 쉽다. 그러므로 경험적인 신학방법은 올바른 신학방법이 될 수가 없다. 다만 체험을 통해서 신학의 내용들을 확증할 수가 있어진다면, 그것은 오히려 추천할 만 할 일이다.   

 

셋째, 계시적인 방법이다.

사람에게서 나온 하나님은 제 아무리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서 얻어낸 훌륭한 결론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제 아무리 심오한 체험을 통해서 얻어낸 확신이라 하더라도 결코 사람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알려질 때라야 올바르게 알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관계라야 올바른 관계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 주시는 것을 가리켜 계시라고 한다. 따라서 신학은 계시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신학이 아니라, 인간학에 불과하다. 설사 신학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왜곡된 신학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계시적인 방법으로 신학을 한다는 것은 선지자나 사도들처럼 특별한 계시를 받아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우리의 구원과 신앙생활 위하여 반드시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을 이미 계시하여 주셨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서 오류나 와전이 없게 배려하셨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다. 그러므로 계시적인 방법으로 신학을 한다는 것은 성경을 기초로 신학 하는 것을 의미한다.   

 

계시적인 방법이라고 하여, 이성적인 연구나 체험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 연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내용들은 하나로 통일된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그 의미가 애매한 부분은 다른 자료들을 활용하여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오해들에 대해서는 무엇이 잘못인지를  밝혀 주어야 한다. 이 모든 일들은 이성이 한다. 그러므로 이성을 불필요하게 여기거나 죄악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이성은 항상 계시를 의지해야 한다. 합리적인 판단이 계시를 앞서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신학이 아니라 철학이다.   한편, 계시의 내용을 체계화한 신학은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서 그 사실 여부가 확인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체험과 생활 속에서 생겨나는 각종 문제들을 또다시 신학 연구의 주제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신학은 체험을 체계화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를 체험으로 확증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이처럼 계시적인 방법은 이성과 경험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종합적인 방법이라고도 불려진다.   

 

신학의 역사

 

신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학은 오랜 시간에 걸친 경건한 성도들의 연구과정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발전이 되었다. 그리고 교회 안팎에서 생겨난 여러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피와 땀으로 얼룩졌었던 여러 회의들에서 공적인 인정과정을 밟았다. 신학의 발전 과정과 연관해서 보면, 초대교회 시대, 중세교회 시대, 종교개혁 시대, 근세교회 시대, 현대교회 시대가 각기 다른 특징들을 보이고 있다.   

 

1) 초대교회 믿음은 고백을 요구한다. 처음에는 그 고백이 개인적이고 단편적이었다. 그래서 경우마다 차이가 있었고, 일관성도 부족했다. 따라서 일관되고 표준적인 고백이 필요했다. 이러한 요구의 결과는 신학의 탄생을 가져왔다. 가장 우선하는 고백은 이방신들과 구별되는 하나님이었다. 그리고 세상을 구속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서는 주로 삼위일체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에 관한 교리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교리가 신학의 주된 주제이었다.   초대교회에는 유대교나 희랍철학으로부터 가해자는 공격이나 오해들이 많았었다. 로마로부터 가해지는 핍박이나, 이방종교들로부터 들어오는 미신적인 습관도 있었다. 또 때로는 이런 배경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한 사람들로 인한 복음의 변질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자기들이 처음 가지고 있었던 사고방식으로 복음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신학은 이런 것들에 맞서서 성경을 올바르게 정리하고, 변론하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이 되었다. 이레니우스, 터틀리아누스, 아타나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또 이단들을 분별하고 정죄하기 위한 교회의 회의들도 많이 있었다. 니케아 회의(325년), 콘스탄티노플 회의(381), 에베소 회의(431), 칼케돈 회의(451) 등이 대표적인 회의이다. 정통교회의 신학은 이러한 회의들에서 만들어졌다.   

 

2) 중세교회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에 기독교를 공적으로 인정했다. 이제 박해는 그쳤다. 그러나 교회는 외형적인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얼마 후 로마의 교회는 로마가 정치적 중심지라는 지위를 이용하여서, 다른 지역의 교회들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대표권을 행사했다, 마침내 590년에는 로마에 초대 교황이 등장했다. 교황은 사도 베드로로부터 사도직을 이어 받아 교황이 되었다고 했다. 따라서 신학은 자연히 초대 교회의 전통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외형적 조직의 필요에 따른 교회의 제도와 의식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임박하게 여기던 주님의 재림은 소식이 없고, 주변에서는 죽는 사람이 늘어만 가게 되자, 죽음 이후에 관한 내용이 신학의 상당한 논의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다.   중세교회에서는 신학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되었다. 평신도들이나 일반 성직자들은 신학 연구를 허락 받은 사람들의 결과를 그대로 따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심지어는 대부분이 성경을 읽는 것조차 허락을 받지 못했다. 함부로 사사로이 성경을 풀다가 그릇되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지나치게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일부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분위기를 대하는 경우가 있다.   

 

3) 종교개혁 시대 종교개혁 시대에는 신학연구와 토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종교개혁 시대의 신학은 초대 교회의 신학으로 되돌아 갈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초대교회의 전통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었다. 초대교회 신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이것은 중세교회의 신학에 만족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개혁이라는 표현에서 이미 그 자세를 엿볼 수가 있다.   종교개혁 시대의 신학은 성경 또는 계시에 관한 교리에 집중이 되어 있었다. 종교개혁 시대의 신학은 교회의 전통이나 일방적인 가르침에 무조건 따르는 것을 반대했다, 누구든지 자기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자기가 직접 성경 속의 교훈을 찾고, 체계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 종교개혁 시대의 신학 자세이었다. 그런데 획일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각자의 성경 해석에 의한 신학에는 보는 관점에 따른 차이들이 있었다. 그 차이는 심각한 대립을 낳기도 했다. 때로는 그러한 차이로 말미암아 피를 흘리는 일도 있었다. 이 때문에 신학 무용론을 주장하는 극단적인 사람도 생겨났다.   종교개혁 시대 신학의 또 다른 중심주제는 구원에 관한 것이었다. 종교개혁 시대의 신학은 구원이란 공로를 쌓는 것이나 제도에 가담을 하는 것이나 의식을 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신학이었다, 그래서 "오직 성경" 또는 "오직 믿음"이라는 말이 대표적인 표어로 등장했다.   

 

4) 근세 근세는 계몽사조와 더불어 인본주의가 팽배하던 시기이다. 또 산업혁명으로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새로운 사회질서가 도입되던 시기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으려 하기보다,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 보려고 하기에 분주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가능성을 예수님의 인성에 찾으려 했다.   근세의 신학은 사람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지닌 하나님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다만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삶이 실천되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근세의 신학은 요한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보다, 공관복음에 계시된 삶으로서의 예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모델이 될 만한 인간상으로서의 예수의 생애를 그려내는 것이 근세신학의 유행이었다.   

 

5) 현대 제 1, 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노래하던 근세의 낭만적인 꿈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각종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어 인간에게 유익을 주리라던 산업은 오히려 생존을 위협하는 심각한 환경의 오염을 가져왔다. 핵 위협을 비롯한 대형 재난들은 종말론적인 위기의식을 커다란 관심사로 부각시켰다. 따라서 현대의 신학은 수평적인 윤리문제보다,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제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일로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한낱 예수라는 사람으로 전락해버린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으로서의 면류관을 되찾아 드리기 위한 시도를 개시했다.   한편, 현대의 신학은 분업화 또는 다양화되어진 현대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해결책을 추구하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는 다양한 사회 구조 속에서 원만한 사회를 이루려고 하면, 다른 사람이나 기독교 이외의 집단을 고려하여야 한다는 사람들을 생겨나게 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불변의 규범을 따라야 한다는 지난날의 자세를 버리고, 주변 상황에 따라서 결과보다는 그 동기를 중시하는 자세를 가져야 산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현대의 신학은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연구결과를 생산해 내고 있는 현대과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진화론으로 신학을 짜 맞추어 내기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달라진 현대인의 예술 감각에 알맞는 영성을 추구하기 위하여 신학 표현의 획기적인 전환을 시도하기도 한다. 또 가까워진 지구촌의 생활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다른 종교들과의 공존을 모색하기도 한다. 

 

  현대의 신학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회복하려고 하는 자세는 퍽 다행이다. 그리고 당면하고 있는 현대사와 사회에서 생겨나는 문제들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태도는 매우 바람직하다. 그러나 현대의 신학은 그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성경에서 벗어나는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 많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신성을 회복하려다 인성을 무시해 버리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동기에 따른 판단을 주장하려다가 절대적인 성경의 규범을 포기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더 큰 유익을 위해서라면, 작은 악을 용납해도 좋다는 유혹에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 화합을 위해서라면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기초를 둔 기독교의 주체성마저도 포기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오류들은 대부분 성경의 어느 한 부분에 편중된 신학을 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신학은 모든 개인이나 모든 시대의 필수적인 공유물이다. 신학의 형태나 수준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성도는 모두 신학을 하고 있다. 신학은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르지 못한 신학은 신학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학이나 철학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성과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는 신학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기초를 성경에 둔 신학을 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적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을 얻기 위한 연구와 실천을 항상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할 때 신학은 경건을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 되는 것이다. 올바른 학문과 참된 경건은 서로 비례 하는 것이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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