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미묘한 사이, 한일 관계사 속의 기독교

크리스찬 투데이 - 조덕영박사글

 

 

영원히 미묘한 사이, 한일 관계사 속의 기독교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의 자녀요 형제였다. 놀랍게도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이 형제지간에 벌어졌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살인의 동기가 거창한 원한이 아니라, 누가 더 하나님을 잘 섬기느냐 하는 신앙적 질투였다는 점이다. 인간은 늘 이렇게 자신과 무관한 사람보다는 인과관계에 묶여있는 사람들과 애증의 관계를 가진다. 서로 가깝고도 먼 나라인 한일 관계도 이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실은 모든 면에서 너무 가깝기에, 한일 관계는 늘 서로 복잡하게 감정이 얽히게 되고 역사 속에서 그 원한의 골을 깊게 만들어왔다. 그렇다면 한일 관계사 속의 기독교는 어땠을까?

한반도, 일본 열도 그리고 기독교

18-19세기 한반도에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들어오기 이전부터 이미 한국과 일본은 신앙 안에서도 다양한 접촉이 있어왔다. 진위 여부를 떠나 가야가 기독교 국가요 도마가 실제로 한반도에 들어왔었다면 당연히 일본 열도도 그 영향권 아래 들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발해와 통일신라와 고려를 통해 경교가 들어 왔었다면, 선교의 속성상 당연히 한반도를 통해 일본 열도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일본은 예수와 공자도 일본 열도에 들어와 살다 일본 땅에 묻혔다고 주장하는 황당한 문서가 남아 있을 정도이니, 종교에 대한 문화적 수용력이 얼마나 포용적인지 알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를 통해 들어간 도마나 가야 기독교나 경교의 특별한 흔적은 한반도 속에서의 흔적이 뚜렷한 증거가 아직 없는 것처럼, 일본 열도에서도 찾기 어렵다. 오히려 일본 열도 속에는 고조선의 신화나 가야 건국 신화의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 일본 문화의 원류가 한반도였음을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들어오면서 이런 흐름은 역전되기 시작했다. 성리학의 나라 반도의 조선보다 일본 열도의 바닷길은 훨씬 더 크게 열려 있었다. 일찌감치 종교개혁이 시작된 16세기(1544년)부터, 이미 일본 가고시마(鹿兒島)에는 이 길을 따라 포르투갈 상선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 뱃길을 따라 복음도 함께 들어왔다.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가 1549년 일본에 입국한 지 2년 만에 열도의 일본인 100여명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이들 서양 상선들이 전한 기독교를 가장 먼저 허용한 열도의 권력 집단은 놀랍게도 백제 성왕의 자녀인 임성태자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야마구치(山口) 지역의 지배자 오우치(大內) 가문이었다. 오우치 가문은 반도를 늘 자신들의 고향땅으로 여기고 자신들의 뿌리를 찾기 위해 조선 시대에만 무려 70여 차례나 사신을 보냈을 정도로, 반도에 대한 애착이 강한 가문이었다. 오우치 가문이 조선인들이나 조선 조정에 늘 우호적이었던 것은 바로 자신들의 뿌리가 반도에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들의 보호 아래 포르투갈 상선을 따라 들어 온 자비에르 선교사와 그 일행들의 활약으로 복음의 영향력은 규슈 지방으로부터 당시 수도였던 교토 인근에 이르기까지 이르렀다. 일본 속 기독교 신자는 1605년 무렵 75만 여명까지 늘어났고, 121명의 선교사가 일본 땅을 밟았다. 일부 개신교도 네덜란드, 영국 상선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열도에 발을 딛게 되었다. 반도에 표류했던 귀화인 박연이나 하멜도 상선을 타고 일본을 오고가던 네덜란드인들이었다. 훗날 일본 엘리트 초-중-고 대학의 60% 이상이 기독교학교법인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열도 동부의 명문 아오야마(靑山)학원대학, 조치(上智) 대학이 미션스쿨이요, 서부 명문 간사이(關西), 도시샤(同志社) 대학도 기독학교들이었다. 

기독교를 악용한 풍신수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 아래 보호받으며 성장하던 일본 기독교는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1536-1598)로 인해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고 일본 최초 순교자가 나온 것도 풍신수길 시대였다. 중국 정복에 대한 오다 노부나가의 환상과 야망은 풍신수길에게 바로 이어졌다. 기독교도 풍신수길에게는 야망의 도구일 뿐이었다, 한때 풍신수길은 구주(九州)를 평정하면 나가사끼(長崎)를 그리스도교회에 기부하겠다고 정치적 제스처를 취한 적이 있다. 이것은 풍신수길이 무슨 신앙이 있어서가 아니라, 실은 열도 전체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난 다음에는 명(明)과 조선(朝鮮) 출병을 위해 필요한 포르투갈 함선 2척을 구입하기 위한 기만술책이었다. 풍신수길은 또한 “명(明) 출정 준비 중 일본의 반은 그리스도교가 될 것이고 명을 정복하면 백성들 모두 그리스도 교인이 되도록 명령하겠다”고 현혹하였다. 가톨릭교도들이었던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앞에서였다. 신앙을 자신의 야욕을 위한 도구로 삼은 악과 불의의 아이러니한 아픈 역사의 시작이었다. 결국 풍신수길은 한반도 침략을 실행에 옮긴다. 한일 간의 악연은 이렇게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악을 선으로 갚다

풍신수길은 정말 악한 자였다. 하지만 그도 하나님의 장중 아래 있는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 세상 모든 일이 하나님 주권 아래 일어난다고 악과 불의의 역사도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라고 말하면 안 된다. 사람은 악을 도모한다. 그리고 그 악과 불의는 하나님의 공의와 선하심을 거스르는 분명한 반역행위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신 뜻을 끊임없이 거역하고 방해하며 좌절시키려는 악과 불의의 세력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반역 세력의 악함조차도 주권적 섭리로 제압하고 승화하여 궁극적으로 자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의 핵심이다. 풍신수길은 악을 도모하였으나 임진왜란은 세스페데스 신부 일행의 한반도 입국과 포로로 잡혀간 일본 안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이 생겨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 한(恨) 많은 일본 땅에서 오따 줄리아(儒立亞)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가 생겨났다. 선교사 같은 삶을 살다 순교한 인물도 나왔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소년 카이오는 난파된 배에서 홀로 살아남아 교토로 올라가 절에서 살다 병으로 쓰러져 고열로 시달리다 환상 중에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로 그리스도교인이 된다. 1614년 그는 국외로 추방된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을 따라 지금의 필리핀 마닐라로 갔다. 우콘이 그곳서 병사한 후 그는 조선 땅으로 돌아오지 않고 구주(九州)로 돌아간다. 전도자의 삶을 살던 그는 결국 잡혀 나가사키의 옥(獄)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1624년 11월 5일 기쁘게 화형당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신앙 안에서 그는 낯선 일본 땅에서 악을 선으로 갚았다. 조선 무관(武官)의 아들이었던 권 빈첸시오는 전쟁고아로 1603년 세례를 받고 예수회 신학교 교육을 받고 정식 전도자가 된다. 그리고 세스페데스 신부 이후 조선 선교를 위한 파송이 결정된다. 해로를 통한 입국이 좌절되자 중국으로 건너가 육로 입국 기회를 노리던 그는 청나라가 들어서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결국 그는 다시 한반도 고향땅을 밟지는 못했다. 그리고 카이오처럼 1625년 니시사카 형장에서 화형으로 순교했다. 복음이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 이렇게 한반도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포로로 잡혀갔던 타국 일본 열도에 순교의 피를 뿌렸다. 이렇게 반도에서 잡혀 간 조선 포로들은 열도 속에서 악을 선으로 갚은 것이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 같은 씨 다른 꽃(열매)이 피다

한일 두 민족의 주역이 한 뿌리라는 것은 서로가 부정하려 해도 고고학적·문화적·유전학적·언어적·문헌적으로 모두 증 된다.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에서 세계 문명 공동체를 나누면서 한일민족을 함께 취급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두 민족의 주류는 결국 넓은 대륙에서 만주를 거쳐 반도와 열도에 정착한 유목민들의 후예였다. 2천 년 전 전후 단군 신화를 지닌 집단은 반도를 거쳐 꾸준히 열도로 유입되었다. 가야를 포함한 한반도 4국 백성들도 지속적으로 열도로 진출하였다. 특별히 백제 유민들은 야마토왜(大和倭) 정권을 세워 고대 일본의 시작을 알렸다. 일본 태생의 백제 무령왕과 일본 게이타이 천황이 형제(또는 사촌) 지간인 것이 두 왕실집단 간의 친연성을 암묵적으로 증거한다.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가 일본 역사는 뒤로 하고 한반도 백제 역사를 상세히 다루고 특별히 일본 출신 무령왕의 아들 성왕을 성명왕(聖明王) 또는 명왕(明王)이라고 칭송하며 신사(神社)에서까지 받드는 것은 예사롭지가 않다. 일본 역사서가 백제 성왕의 허무한 죽음을 애석해 하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신라·당 세력과 백제·왜 세력 간의 백촌강 대전투 이후, 열도와 한반도는 드디어 완전히 분리되었다. 백촌강 전투 이후 663년 9월, 백제땅 주류성(州柔城)이 마지막으로 함락되었을 때 《일본서기》는 야마토왜(大和倭), 즉 나라(奈那)의 ‘난바’(難波) 사람들의 심정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주류(州柔)가 함락되었으니 이제 어쩔 도리가 없게 되었구나. 오늘로서 백제라는 이름이 끊어졌으니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그곳을 어찌 다시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라고. 지금의 오사카 중심지 ‘난바’는 고대 백제인들의 새로운 나루터(難波津)의 이름이었다. 심지어 일본 <고사기>(古事記)에 나타난 천황가의 일본 황실 조상 귀신(鬼神)인 아마데라스오오미가미(天照大神)의 손자인 니니기노미고토(瓊瓊杵尊)의 천손(天孫) 강림 신화에도 보면 “이곳이 한국을 바라보고 있으니 큰 길지(吉地)”라고 말하여, 일본 천황의 원적(原籍)이 한국임을 분명히 하면서 고향 한반도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백촌강 전투를 기점으로 한반도와 열도는 영원히 다른 나라가 되어 버렸다. 일본 오사카 역사박물관 전시실 입구가 백촌강 전투부터 보여주고 있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닌 의미심장한 복선이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노마드 기질을 가진 두 민족이 반도와 열도라는 갇힌 환경으로 갈라져 만들어낸 결과와 열매는 너무도 달랐다. 지난 세기 한민족은 좁은 한반도를 떠나 많은 유랑민과 이민의 행렬이 온 세계로 흩어져 여전한 노마드 기질을 보여준 반면, 더는 진출할 땅이 없는 열도에 갇혀버린 일본인들은 고립된 섬에서 대륙의 끝자락 한반도로 다시 자신들의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것은 뿌리의 땅인 한반도와의 화해와 협력이 아닌, 역사적 애증과 결합하여 힘과 폭력과 감정과 역사에 대한 억지 해석에 기초한 잔인하고 교활한 침략의 형태로 나타났다. 김용운 박사의 말대로 한일 양국은 인종적으로 같은 족속으로 시작되어 2천년의 역사 과정에서 같은 씨에서 다른 꽃이 핀 (애증의) 두 나라가 되어 버렸다. 마치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의 관계처럼. 결코 서로를 배려하고 용서하려 들지 않는 이 두 나라를 어찌할 것인가.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피로

역사를 이어 온 그 상처와 아픔을 어찌할 것인가. 줄리아와 카이오와 권 빈첸시오 뿐 아니라 또 다른 임진왜란의 희생자들, 그리고 일제 36년 한반도 안에서 일어난 그 많은 희생과 순교의 피는 또한 어찌할 것인가. 악을 악으로 갚을 것인가. 친일을 무슨 종북처럼 주홍글씨를 씌우려는 정치적·민족적 쇄국 분위기는 분명 정상은 아니다. 언제까지 두 민족이 반도와 열도에서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저주하고만 있을 것인가. 검으로 흥한 자 검으로 망할 뿐이다.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윽박지른다고 용서받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피의 종교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였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치 않으시는 분이다. 세상은 세상의 방식으로 되갚기를 원할 수 있다. 그것은 영원한 원한과 저주와 갈등만 양산할 뿐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다르다. 세상적 한일 관계와 기독교적 한일 관계는 같은 듯 다르다. 기독교는 용서와 화목의 종교다. 용서하는 것은 아프고 힘든 일이다. 그러나 용서해야 한다. 하지만 공의와 진리를 당당히 요구하되 사랑으로 갚아야 한다. 역사의 창조 섭리를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분명 선교와 기독교적 사랑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처럼 십자가 사랑 속에서 진정한 용서와 사랑으로 승화 시키는 기독교적 화해밖에는 길이 없다. 일본에게 복음으로 손을 내밀 민족은 결국은 우리 민족 말고는 보이지가 않는다. 

(※이 글은 7월 12일(토) 9시 30분부터 서울 대치동 서울교회에서 있을 ‘창조론 오픈포럼’에서 조덕영 박사가 발표할 논문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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