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뱅에 대한 오해와 진실(최윤배교수의 깔뱅의 구원론)
2. 깔뱅에 대한 오해와 진실
삼위일체론 또는 기독론 이단자로서 화형당한 세르베투스(Servetus)의 처형 문제로 깔뱅 자신은 물론 개혁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해오고 있다. 만약 우리가 16세기 당시 역사적 정황을 정확하게 알경우, 깔뱅과 개혁교회를 향한 부정적인 시각은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 이단자들이 화형을 당하는 것은 16세기 종교적 보편관행이었고, 기독교 모든 교파들(중세 로마 가톨릭교회, 루터파, 개혁파, 재세례파 등)은 다른 교파들의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했는데, 상대적으로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가 다른 교파들의 사람들을 가장 많이 처형했고, 깔뱅이 속한 개혁파가 적게 처형했다. 또한 세르베투스를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이 목회자 깔뱅에게는 없었고, 제네바 시정부에게 있었는데, 제네바는 세르베투스 처형 전에 대표적인 교회들과 시정부들에 여론조사 과정을 거쳤던 유일한 시정부였다. 제네바의 여론조사 편지를 받은 교회들과 시정부들은 이단자 세르베투스를 화형에 처해달라는 내용으로 회신했다.
깔뱅은 옥중에 있는 세르베투스를 방문하여 언제든지 그의 잘못된 교리를 취소하고 살길을 얻도록 목회상담차원에서 호소했지만, 세르베투스는 모욕을 하면서 깔뱅의 말을 거절했다. 깔뱅은 제네바 시정붕에 찾아가서, 만약 세르베투스를 처형해야 할 경우, 고통스런 화형 대신 참수형을 선택해 줄것을 호소했지만, 제네바 시정부도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제네바 개혁교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처형한 어느 기독교 교파들도 자기들의 선배들의 잘못을 역사적으로 회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르베투스가 1553년 제네바 시정부에 의하여 화형당한지 약 450년후인 1907년, 깔뱅의 정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학자들이 합심하여 제네바에 세르베투스 처형에 대한 회개의 비석을 세웠다. 위의 사실들로부터 우리는 깔뱅과 제네바 시정부와 깔뱅의 후손들은 완전히 무흠한 자들은 아니었지만,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합리적 절차를 밟고, 책임적 행동을 하려고 노력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